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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칼럼]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4차 산업혁명으로 향후 몇년 안에 일자리의 몇십퍼센트가 사라져버릴 것이고, 그 상황에 기민하게 조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것이고, 변화된 교육을 시키지 못하는 부모의 자녀는 모두 실업자가 될 것이라는 ‘지식장사꾼’들의 ‘협박’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사회적 약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우리의 지향점은 바뀔 수 없다.
하종강 노동조합에서 고용하는 활동가들이 있다. 대개 ‘부장’ 또는 ‘차장’의 직함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이다. “말이 좋아 조직부장이지 사무실 컴퓨터 고장 나면 고치는 일도 모두 제가 담당합니다” 등의 푸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그렇게 말하는 활동가들의 표정에서 은근히 느껴진다. 대표적 ‘어용노조’의 하나로 분류되는 대기업 노동조합에 ‘민주노조’를 지향하는 소수의 노동자들이 새 노조를 결성했다. 이러한 ‘소수 노조’에게는 경영진뿐 아니라 ‘다수 노조’도 ‘갑’이어서 이중의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그 소수 노조가 주말에 간부 수련회를 마련했다. 주말에 일정을 잡았다는 것은 노조 간부들이 평일에 모이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회사가 ‘근태협조’를 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수련회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간부가 눈에 띄었다. 비품을 준비하고 책상과 의자의 배열을 바꾸는 일뿐 아니라 일정이 모두 끝난 뒤 단체사진을 찍는 일도 당연히 그 활동가 몫이었다. 헤어질 때 그 간부에게 명함을 건네주며 사진들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단체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지만 챙겨서 보내주는 조직은 또 흔치 않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운전을 하고 있을 때 휴대전화로 사진들이 전송돼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보내준 이의 이름이 ‘○○대 총학 2012’라고 전화기 창에 뜬다. 아, 그런 일이 있었지…. 그 무렵 학생운동 불모지나 다름없던 ○○대 총학생회에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들과 함께했던 소수의 학생들이 있었다. 이름도 모를 정도로 소원한 사이였지만 나에게 연락을 했던 그 청년이 10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우리 사회 소수의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있었던 거다. 언제 어느 곳에나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랑삼아 말하자면 내가 몸담고 있는 노동아카데미는 주로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지난 학기 강의를 맡았던 나이 지긋한 강사님이 이번 학기에 수강생 한분을 노동아카데미에 등록하도록 소개했노라며 “예전에 활동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특별히 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으로 들었다. 강의 시작 전 서로 소개하는 시간이나 강의가 끝난 뒤 토론 시간에 그 수강생에게 발언 기회를 자주 주었으나 말을 별로 많이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이런 강의를 들어서 좋았다”는 말만 몇번 들었을 뿐이다. 아나운서로 방송 일을 시작했으나 경제 이슈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방송사 프로듀서의 강의가 이번 학기에 편성돼 있었는데 수강생들로부터 “기대 이상으로 내용이 좋았다”는 평을 들었다. 청아한 목소리와 깔끔한 말씨 속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과 강자에 대한 저항이 오롯이 담긴 강의였다. 지하철역의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라는 안내방송 중 상당수가 자신이 예전에 무보수로 녹음한 것이라는 대목을 설명하면서도 “녹음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혹시라도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 저의 안내방송을 듣고 자신에게도 인생의 문이 열린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강의가 끝난 뒤 각자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에 바로 그 의문의 수강생이 입을 열었다. “저는 ○○○○○를 다녔었는데요…” 아, 20년째 싸우고 있는 대표적 장기투쟁 사업장이었다. “동료들은 지금도 계속 길에서 싸우고 있거든요. 저는 지금 다른 직업을 갖고 있지만…. 생활을 해야 하니까요. 삼성에 납품하는 회사였는데 그래서 저희 집에는 삼성 물건이 하나도 없어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대법원에서 해고가 확정된 뒤 동료들에게 이제 우리 다른 일 하자고… 먹고살아야 하지 않냐고 말한 게… 그게 오늘 너무 미안했어요. 강사님께 고맙습니다.” 계속 싸우고 있는 동지들에게 미안해서 그동안 자신이 차마 그 사업장 출신이라고 아무에게도 말을 못 한 거였다. 그 비밀을 감히 공개하도록 한 것이 그날 강의의 힘이었는데, 그 힘은 윽박지르는 무력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관심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4차 산업혁명으로 향후 몇년 안에 일자리의 몇십퍼센트가 사라져버릴 것이고, 그 상황에 기민하게 조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될 것이고, 변화된 교육을 시키지 못하는 부모의 자녀는 모두 실업자가 될 것이라는 ‘지식장사꾼’들의 ‘협박’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사회적 약자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우리의 지향점은 바뀔 수 없다. 비정규직은 정규직화해야 하고, 노동재해는 줄여야 하고, 노동시간은 단축시켜야 한다.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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