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2일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 입항한 사파이어프린세스호(11만5000t). 부산항만공사
항구를 낀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육성과 지원에 나섰던 크루즈 관광산업이 침몰 위기다. 대표적인 고부가가치 관광산업으로 각광받았지만,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수년간 부침을 겪더니 코로나19까지 터지면서 거의 개점휴업 상태다. 세계적인 대유행(팬데믹)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당분간 회복이 어려울 것으로 보여, 관련 지자체 등의 한숨도 깊어가고 있다. ■
올해 크루즈선 입항 전무 “올해 여행객을 태운 크루즈선 입항이 단 한 척도 없어요.” 24일 <한겨레>와 통화한 김인영 부산항만공사 항만산업부 과장의 긴 탄식이 수화기 너머 전달됐다. 올해 부산항에 입항 예정이던 크루즈선 180항차(항차=1회 입항) 중 6월 말까지 82항차가 취소됐다. 김 과장은 “설 연휴 이후 국내에서도 코로나19가 발생했고, 2월부터 크루즈선 국내 항구 입항이 금지됐다”며 “여행객을 태운 크루즈선은 한 척도 입항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여행객을 태우지 않은 크루즈선 6척이 입항해 항해에 필요한 유류와 생필품 등을 싣고 떠난 게 전부다. 크루즈선을 운영하는 세계 각국의 모든 선사가 10월 말까지 운영 중단을 발표해 사실상 올해 예정된 모든 입항 계획이 취소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인천크루즈터미널에 입항한 셀레브리티 밀레니엄호. 인천항만공사
크루즈선이 정박할 수 있는 제주와 인천, 여수, 속초, 포항 등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인천항 크루즈전용터미널 역시 올해 기항 예정된 18항차 모두 취소될 것으로 점쳐진다. 중국와 일본 의존도가 높은 제주도 역시 크루즈선 입항이 전무하다. 올해 예정된 497항차 대부분이 취소됐다. 6~11월 9항차 크루즈선 입항이 계획돼 있던 속초항도 취소 사태를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승객과 승무원 수백~수천명이 장기간 협소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크루즈선 특성상 코로나19에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올해 2월 초 일본 요코하마에 정박했던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집단감염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선박에 탄 승객과 승무원 3700명 중 700명 이상이 코로나19에 감염됐다.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도 정박된 대형 크루즈선 내 집단감염이 잇따라 보고됐다. ■
크루즈 관련 업체 직격탄 크루즈선 입항 취소는 지역경제 타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크루즈선 입항 때 도선·예선과 선원 승하선 관리 등을 대행하는 해운대리점을 비롯해 여행사, 전세버스 업체, 가이드, 통역 등은 일감이 완전히 끊긴 상태다. 유현삼 윌헴슨협운쉽스서비스(해운대리점) 인천사무소장은 “제주와 부산, 인천, 포항까지 올해 예약된 크루즈선 입항 계약 75건이 모두 취소돼 36만달러의 수입이 사라졌다”며 “그나마 우리 회사는 크루즈선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5% 수준밖에 안 되지만, 크루즈선 전용 업체는 폐업 위기에 몰렸다”고 전했다. 부산시와 부산항만공사의 ‘2019년 부산항 크루즈 관련 통계’를 보면, 지난해 108차례 입항한 크루즈선에 납품한 선용품은 607억원 규모였다. 평균 항차당 5억6천여만원이었다. 부산항 입항이 취소된 82항차 기준을 적용하면, 459억2천만원 상당 매출이 사라진 셈이다. 여기에 크루즈 입항객이 부산에 약 7~8시간 동안 머물며 식당과 쇼핑몰 등지에서 지출한 비용 등을 고려하면,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2월 인천항에 입항한 웨스터댐(웨스테르담)호. 인천항만공사
크루즈선 관광상품을 판매하는 여행사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정세영 롯데관광개발 크루즈사업부장은 “세계 각국의 출입국 절차가 까다로워지고, 크루즈선 입항도 금지된 상태에서 10월 예정된 여행상품을 홍보할 여건도 되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롯데관광개발은 올해 5월 2차례 예정됐던 속초항을 모항으로 한 크루즈선 관광상품을 모두 취소했다. 이 상품 예약자만 3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크루즈 여행은 특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은퇴자들에게 인기가 있는데, 코로나19에 노인들이 가장 취약한 것으로 나타난 것도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국내에선 상조업체와 연계한 크루즈 여행상품이 유독 많은 편인데, 이 또한 대부분 취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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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에 ‘휘청’…코로나에 ‘녹다운’ 국내에서 크루즈 관광은 2010년대부터 성장세를 타기 시작했다. 해양수산부의 크루즈 기항지 입항객 현황을 보면, 2011년 144항차에 입항객 15만3천여명이었는데, 2016년엔 791항차 195만3천여명으로 5년 사이 12배 이상 늘어났다. 하지만 사드 갈등으로 중국인 입항객이 줄면서 2017년엔 236항차에 입항객 39만4천명으로 대폭 줄었다. 이듬해엔 131항차 20만1천여명으로 곤두박질쳤다. 이후 3년 동안 중국발 크루즈선 입항은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없었고, 연간 120만명에 이르던 중국인 입항객이 사라진 제주항 국제여객터미널과 서귀포 강정크루즈터미널은 적자에 허덕였다. 2016년 10억4300만원 흑자를 냈지만, 이후론 매년 10억원 안팎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2015년 ‘크루즈산업 육성 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2020년까지 입항객 300만명 돌파’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현실은 정반대가 됐다. ‘황금알’을 낳는 시장을 선점하겠다며 항만을 끼고 있는 지자체와 항만공사 등에서 앞다퉈 건설한 전국의 크루즈터미널도 덩달아 개점휴업 상태다. 제주도가 601억원을 들여 지은 서귀포 강정크루즈터미널(1만1161㎡)은 2018년 5월 2차례 시범 입항 이후 줄곧 비어 있다. 국비 373억원을 투입해 2017년 9월 개장한 속초항 국제크루즈터미널도 지난해 5차례 입항에 그치는 등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지난해 4월 문을 연 인천항 국제크루즈터미널(연면적 7364㎡)은 지난해 10차례 입항이 실적의 전부다. 길이 430m, 22만5000t급 초대형 크루즈선이 기항할 수 있는 터미널은 해양수산부와 인천항만공사가 1186억원을 들여 건설했다. 인천항만공사가 텅 빈 인천 국제크루즈터미널 부두시설을 자동차 운반선 정박지로 제공하는 등 다른 활용방안 찾기에 나서고 있지만, 마땅한 대책은 없는 실정이다. 지난해부터 중국 정부의 한한령(중국 내 한류 금지령)이 누그러지면서 회복세가 기대되는 분위기였지만, 코로나19 사태로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특히 관광상품 가운데서도 크루즈 관광은 항공 노선과 폐쇄된 국경이 완전히 개방된 뒤 가장 늦게 회복될 가능성이 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해양수산부는 지난 3월 2021~2025년 ‘제2차 크루즈산업 육성 기본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크루즈선사 ‘홀랜드아메리카라인’의 한국사무소를 운영하는 김정호 동보항공 이사는 “미국에선 크루즈선 내 객실을 코로나19 확산으로 부족한 일반 병상으로 대체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업계 전체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다. 겨울상품을 판매해야 하는데, 현재의 상황에선 모집 홍보도 쉽지 않다. 크루즈가 안전하다는 인식이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며 “국내 크루즈 관광 시장은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춰 입항객을 다변화하는 한편, 지역 소비를 일으킬 수 있도록 지역 주요 관광시설과 연계한 상품 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업계에선 전세계적으로 ‘케이(K)방역’의 우수성이 입증되고 있는 만큼, 다른 나라보다 크루즈산업 회복 속도가 빠를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다. 이정하 기자
jungha98@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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