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김도훈의 낯선 사람
린지 로언
‘퀸카로 살아남는 법’으로 스타덤
이후 몰락한 삶 상품처럼 소비돼
왜 여성 비극에 이토록 집요할까
대선 앞 우리도 비슷한 모습 보여
2013년 린지 로언이 새 영화 <무서운 영화 5> 시사회에 참석해 밝게 웃고 있다. AP 연합뉴스
나는 미국 십대 학교 코미디를 좋아한다. 물론 나는 미국에서 십대 시절을 보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작은 마을 학교에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마리화나를 피우는 미식축구부원들에게 걸려서 갈굼을 당한 뒤 씩씩대며 방구석에서 헤비메탈을 듣다가 새아빠의 “갓 댐 잇! 턴 오프 더 뮤직!”이라는 외침을 들은 적이 있는 것만 같다. <최선의 삶>이라는 올해 최고의 독립영화 중 하나를 찍은 이우정 감독을 만났을 때 그는 할리우드 십대 코미디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며 “어쩐지 미국 고등학교 식당 구석에서 외롭게 혼자 감자튀김을 먹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어쩌면 그런 ‘유사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할리우드 십대 코미디 장르가 그리는 세계는 일종의 소우주에 가깝다. 착하지만 인간적인 흠도 있는 주인공이 소우주로 들어서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곧 우주의 법칙을 발견한다. 잘생기고 돈도 많지만 거만하기 짝이 없는 미식축구부원과 치어리더들이 우주의 중심이다. 당신은 우주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싶다. 그래서 우주의 주변부에서 겨우 살아가는 친구들을 배신하고야 만다. 하지만 당신은 곧 그것이 인간의 선한 본성에 어긋나는 짓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어지는 눈물과 화해, 그리고 화끈한 복수! 드라마!
만약 당신이 이 장르의 최고 걸작을 보고 싶다면 내가 권하고 싶은 영화는 넷플릭스에 있는 <퀸카로 살아남는 법>(2004)이다. 아프리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온 소녀가 정글과도 같은 십대들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자신으로 살아남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이 영화를 정점으로 할리우드에서 가벼운 십대 코미디 장르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2020년대의 십대 코미디는 좀 더 진중한 장르로 진화해 ‘십대 자살’이나 ‘인종 문제’를 과감하게 다룬다. 영화는 시대에 따라 진화하는 법이니 이런 변화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200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십대 코미디에 향수를 느끼곤 한다. 할리우드도 제법 순진한 시절이 있었다는 증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배우 린지 로언의 대표작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린지 로언이라는 이름을 오랫동안 잊어버린 채 살아온 중년일 것이다. 혹은, 린지 로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세대일지도 모른다. 만약 세상에 ‘할리우드 사전’이라는 게 있다면 린지 로언이라는 이름은 ‘짧은 전성기를 누리고 몰락한 하이틴 스타’를 의미하는 단어일 것이 틀림없다. 물론 어린 시절 전성기를 누린 뒤 몰락한 아역 스타는 많다. <나 홀로 집에>의 매콜리 컬킨이나 <터미네이터2>의 에드워드 펄롱을 한번 떠올려보시라. 그러나 세상은 유독 린지 로언의 실패한 경력에 관심이 많다. 나는 지금 거기에 ‘성별’의 차이가 있다고 감히 주장할 생각이다. 린지 로언은 3살 때부터 아역 모델로 활동했다. 수많은 광고로 이르게 돈을 벌어들이던 그는 12살이 되던 1998년에 디즈니 영화 <페어런트 트랩>에서 주연을 맡았다. 어린 시절 이혼한 부모에 의해 길러진 쌍둥이 소녀가 여름 캠프에서 우연히 서로를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린지 로언이 1인 2역을 맡은 이 영화는 거의 1억달러에 가까운 블록버스터급 흥행 성적을 거뒀다. 2003년 작 <프리키 프라이데이> 역시 1억달러가 넘는 수익을 거뒀다. 앞서 말한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 성공을 거두자 린지 로언은 겨우 18살의 나이로 당대 할리우드 최고 스타 중 하나가 됐다. 때 이른 스타덤은 종종 족쇄가 된다. 린지 로언은 엄청난 명성과 부를 스스로 통제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였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들도 꽤 문제가 많은 인간들이었다. 딸의 돈을 노린 두 사람은 마치 자신들이 셀레브리티라도 된 양 폭행과 이혼과 소송으로 미디어를 장식했다. 린지 로언의 삶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는 스타들의 사생활을 쫓는 파파라치들의 난동이 극에 달한 시절이었다. 소셜미디어도 갓 발명됐다. 린지 로언은 브리트니 스피어스, 패리스 힐튼과 함께 당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파티걸’이 됐다. 술과 마약이 뒤따랐다. 아역 시절부터 전 미국인의 사랑을 받던 소녀가 몰락해가는 모습은 매일매일 언론에 의해 노출됐다. 당신은 그 모든 추락이 린지 로언이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지나친 과소비로 2010년에 파산 선고를 받았다. 보호관찰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은 적도 있다. 그가 데뷔 이후 낸 교통사고는 모두 5천번이 넘는다. 당연히 연기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출연하는 영화는 족족 실패했다. 몇몇 감독들은 린지 로언이 불성실한 태도로 영화를 망쳤다며 비난했다. 하지만 그 모든 지옥도가 갓 10대를 넘어서 20대로 달려가는 여성이 홀로 만든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은 린지 로언을 악녀로 만들기 위해 작정을 한 것처럼 보였다. 2005년에는 파파라치가 특종을 만들기 위해 린지 로언이 탄 자동차와 일부러 충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린지 로언은 공허한 눈빛으로 무언가에 취한 채 인상을 쓰거나 울거나 파파라치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누구도 그를 구원할 생각은 없었다. 모두가 린지 로언의 몰락을 마음속으로 몰래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술과 마약에 빠져 스스로의 커리어를 박살 낸 남성 스타들을 꽤 많이 알고 있다. 이상하게도 언론은 유독 여성 스타들의 몰락을 더욱 매정하고 비정하게 뒤쫓는다.
2011년 린지 로언(오른쪽)이 보호관찰 요건을 여러차례 어긴 혐의 등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법정에서 수갑을 찬 채 이동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픽션의 세계에서도 오랫동안 대중문화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여성의 삶을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로 재생산해왔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비극은 <안나 카레니나> 이후로 끊임없이 문학과 음악과 영화에서 변주됐다. 아시아 영화 역사에서 ‘여성 잔혹극’이라 이름 붙일 영화들을 제외한다면 역사를 제대로 쓸 수도 없을 지경이다. 여성의 비극을 다루는 작품들은 현실 세계 속에서 박해받고 속박당한 여성의 지위를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가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유는 남성이 지배하는 귀족 사회에서 스스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드물게 생생한 여성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고전의 지위에 오를 작품들을 제외한다면 여성 잔혹극은 지나치게 자주 반복되어온 경향이 있다. 이건 우리가 여성의 추락을 남성의 추락보다 더 드라마틱한 무언가로 간주한다는 어떤 증거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요즘 매일매일 포털에 뜨는 대선 관련 기사들에서 린지 로언을 먹이로 삼던 파파라치들의 집념을 본다. 우리는 조국보다도 안대를 한 정경심의 사진을 더욱 신나게 공유하며 비웃는다. 이재명을 둘러싼 가십만큼이나 김혜경의 사적인 전화 통화와 소셜미디어 존재의 진위를 더욱 집요하게 궁금해한다. 그의 수행원이 검은 망토를 입고 나타난 순간 언론은 ‘다스 베이더’라는 표현을 기사 속에 써가며 신나게 오보를 날렸다. 우리는 윤석열보다도 김건희의 과거에 대한 가십을 더욱 즐겁게 소비한다. 심지어 진보 여성 정치인들도 김건희를 예의 영어 이름으로 부르며 소셜미디어에서 ‘좋아요’를 갈구한다. 그들 모두에게는 허점이 있을 수도 있다.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비밀이 있을 수도 있다. 과오가 있을 수도 있다. 물론이다. 대선에서는 후보만큼이나 배우자의 도덕성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남성 정치인들보다도 반려자들의 추락을 더욱 즐거운 엔터테인먼트처럼 소비한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린지 로언은 돌아온다. 오랫동안 대중의 눈을 떠나 있던 그는 2022년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크리스마스용 로맨틱 코미디를 찍었다. 스틸 사진이 공개되자 숨죽이던 오랜 팬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영어 기사들을 검색하던 당신은 결국 쓴웃음을 짓고야 말 것이다. 많은 기사는 린지 로언의 컴백을 환영하는 척하면서 사진 속 달라진 얼굴로부터 어떻게든 ‘성형’의 흔적을 캐내려 애쓰고 있다. 세상은 퀸카가 살아남기를 바라지 않는다. 킹카들의 세상에서 결국 퀸카는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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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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