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지역은 ‘조선의 폼페이’라고 불린다.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조선시대의 유물들로 인해 이같은 별칭이 붙여졌다. 종로구가 과거 서울 사대문 안에 위치해 있던 지역인 만큼, 이곳에서 유물이 많이 발굴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 ‘조선의 폼페이’라는 별칭답게 이곳에서 다시 유물들이 대거 발굴되어 학계의 뜨거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종로구 인사동의 한 공사 현장에서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금속활자와 물시계에 들어가는 부품 등 1,500여 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면서 이 지역이 유물의 성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따른 최초의 금속활자 발굴
1,000여 점이 넘는 유물들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유물은 바로 금속활자들이다. 금속활자들은 한자가 쓰여진 활자 1,000여 점과 한글이 쓰여진 활자 600여 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한글 금속활자는 지금까지 출토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평가를 받고 있다.
현존하는 한글 금속활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을해자(乙亥字)’ 금속활자들이다. 을해자 금속활자는 1460년에서 1480년대 사이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반면에 이번에 발굴된 한글 금속활자는 세종 때 간행된 국내 최초의 음운서인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따랐다는 점이 중요한 사항이다. 동국정운에는 ㅱ, ㅸ, ㆆ, ㆅ 같은 활자가 등장하는데, 바로 이 같은 활자가 박힌 금속활자가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동국정운은 세종대왕이 조선의 한자음을 바로 잡기 위해 집현전 학자들인 신숙주와 박팽년 등에게 명을 내려 지난 1448년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 교본이다. 한문을 훈민정음으로 읽은 방법을 알려주는 동국정운식 표기법이 새겨진 금속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글 금속활자와 함께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은 유물은 한자로 쓰여진 금속활자 중에서도 갑인자(甲寅字)로 이루어진 금속활자다. 갑인년인 1434년에 제작된 활자여서 ‘갑인자’라고 명명된 이 활자체는 다른 어떤 금속활자보다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갑인자는 금속활자 인쇄술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활자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모두 20여만 자가 제작된 갑인자는 어떤 내용의 글자도 고속으로 인쇄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발굴된 한자로 쓰여진 금속활자가 제공하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우선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도 서양에서 최초라고 알려진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더 빠르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고, 이미 금속활자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금속활자 기술의 정점을 찍은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제작된 금속활자가 비슷한 시대, 어느 지역의 활자보다 더 뛰어난 이유는 태종에서 시작하여 세종대왕에 이르기까지 2대에 걸쳐 꽃을 피운 기술혁신의 결과였다.
조선의 세 번째 왕위에 오른 태종은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동을 기반으로 하는 금속활자의 주조를 강행했다. 그러나 태종 시절에 만들어진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들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목판본들과 비교하여 품질 면에서 별로 차이가 없었다.
기술적으로 향상된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태종은 금속활자 사업을 세종에게로 계승하여 기술이 이어지도록 조치했다. 그 결과 세종은 뛰어난 인력을 확보하면서 기술적으로 한 단계 더 진보한 금속활자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당시 기록된 자료에 따르면 1402년 태종 시절에 나타난 인쇄 과정에서의 결점이 1421년 세종 시절에 접어들면서 개선된 것으로 드러났다. 청동으로 만든 금속활자의 완전한 규격화와 정밀한 주조기술의 개량에 의해 조판기술은 놀라우리만치 향상되었고, 덩달아 인쇄 효율도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술적 발전은 1434년에 이르러 갑인자의 주조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421년부터 시작된 세종 시절의 금속활자 사업이 14년 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금속활자 인쇄는 거의 완벽한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능률 또한 수십 배로 향상되었다.
사실 태종부터 세종까지 진행된 청동 기반 금속활자 주조는 중국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해 버려지다시피한 기술이었다. 그런 기술을 조선이 도입하여 보다 향상된 결과를 낸 것인데, 이같은 사례는 당시 중국 주변의 어떠한 국가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일이다.
한편 이번에 종로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 중에는 물시계 제작에 들어가는 장치도 포함되어 눈길을 끌고 있다.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밖으로 나와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다.
또한 유물들에서 ‘일성정시의’와 관련된 부품도 발견됐는데,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고 밤에는 별자리를 이용하는 시계다. 지금까지 기록으로만 남아있고 실물은 없었는데, 이번 발굴을 통해 일성정시의의 존재가 분명해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이번 발굴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우량계(雨量計) 역시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한 세종 시대의 발명품들 중 하나다. 계절 별로 나타나는 자연현상을 기기를 사용하여 수량적으로 측정하는 과학적 방법이 세종 시절에 이미 상용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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