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SWEAT 스웨트 : 땀, 힘겨운 노동>(이하 스웨트)과 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는 미국을 배경으로 노동과 인종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와 멀리 떨어져 상관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끊어진 노동자의 연대,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와 편견은 우리 사회에서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은 노동자의 연대를 끊어버리고, 연대가 끊긴 노동자는 자신보다 약한 자를 향해 분노와 혐오를 내뱉는다. 별다른 문제 없어 보이던 계층과 인종 차이는 일자리를 둘러싼 갈등이 벌어지면 혐오와 분노로 바뀌는 것이다. 결국 그런 사회는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싸움터이자 파괴의 공간으로 바뀐다.
‘빵과 장미’의 연대는 왜 <스웨트>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빵과 장미’(Bread and Roses)는 미국의 여성·노동 운동을 상징한다. 그 시작은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런스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해달라며 든 파업 피케팅에서 비롯한다. 피켓에는 미국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이 쓴 시에서 따온 ‘빵뿐만 아니라 장미를 원한다’가 적혀 있었다. ‘빵’은 생존, ‘장미’는 존엄을 뜻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에게 연대를 제안했으나, 외면당한다. 여성 노동자들은 서로 연대하며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 연극 <스웨트>는 그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왜 연대는 깨졌을까? 연극은 2000년대 초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철강 도시 레딩을 배경으로 한다. 여기에 철강공장 노동자의 쉼터 같은 선술집이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철강공장에서 20년 넘게 일한 흑인 신시아와 백인 트레이시는 이 술집의 단골이다. 두 사람은 남편 도움 없이 자식을 키우며 땀내 나는 노동을 통해 집안을 이끌어가는 ‘철의 노동자’로 나온다.
절친이던 두 사람은 신시아가 관리직으로 승진하면서 우정에 금이 간다. 블라우스와 정장 바지를 입을 수 있게 된 신시아와 여전히 기름때 찌든 작업복을 입어야 하는 트레이시는 계급이 갈리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이때 회사는 공장을 멕시코로 옮겨 인건비를 줄이려 하고, 노조는 파업으로 맞선다. 생산라인은 중단됐지만, 회사는 인건비가 싼 히스패닉 직원들을 몰래 비정규직으로 고용한다.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히스패닉계 오스카는 비정규직 자리를 지원해 일하게 된다. 이어지는 해고와 직장폐쇄. 노동자 천국이었던 선술집은 어느새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싸움터이자 파괴의 공간으로 바뀐다. 끝내 노동자들은 자본의 횡포에 무릎을 꿇고 뿔뿔이 흩어진다. 100여년 전 똘똘 뭉치며 연대를 했던 노동자들은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연극은 그 지점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노동자의 약한 고리를 회사가 치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회사는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분할 통치)로 노동자의 연대를 끊어버린다. ‘디바이드 앤드 룰’이란 뭉치면 위협이 될 수 있는 여러 세력을 서로 이간질해 분열하게 만들어 지배하는 전략이다. 파격적으로 신시아를 승진시킨 이유는 현장 출신에게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의 분열을 노린 것이었다. 현장 노동자들 분노는 회사가 아닌 중간관리자로 방향을 틀었다. 히스패닉계 노동자에게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한 것 역시 연대를 끊어버리기 위해서였다. 평소 투명인간 취급을 받던 히스패닉계 오스카는 단지 시급을 더 주는 공장에 취업했을 뿐인데도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비난을 받고, 20년지기 친구 사이도 서로 지위가 달라지자 인종이 ‘뒷담화’의 소재가 된다. 자본의 분열 전략은 유효했다. 백인 노동자를 대표하는 트레이시는 분노하고 좌절한다. 그 분노는 처음엔 잘 드러나지 않았던 흑인과 히스패닉을 향한 무시와 백인우월주의로 나타난다. 끝내 분노는 ‘혐오’로 이어진다. 노동자라는 단단한 연대는 이렇게 무너진다. 정작 싸워야 할 상대가 아닌,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 분풀이한 대가는 참혹했다. 그렇다고 관리자가 된 신시아와 파업하는 와중에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오스카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
오스카는 연극 클라이맥스에서 이렇게 절규한다. “우리 아버지는 철강공장의 청소부였어요. 아버지는 노조에도 가입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나갔어요. 어떻게든 자리를 잡으려고요. ‘언젠가는 나를 받아들여 주겠지.’ 그러면서 그 거지 같은 현장 바닥을 쓸었어요. 공장 사람들은 매일같이 여기 ‘바’에 오지만, 날 본 척도 않고 지나쳐 가요. 그 사람(노조원)들도 나를 안 봐주는데, 나라고 그 사람들을 봐줘야 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100년 전엔 노동자와 사용자라는 이분법 구분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세계화에 따른 자본의 이동, 인종 갈등, 비정규직 등장 등 다층적인 문제가 결부되면서 노동자의 연대는 예전만큼 단단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무자비한 자본의 횡포를 휘두르는 경영진은 연극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에 더 두려운 유령처럼 그들은 연극에 나오진 않지만 아이러니하게 더 무서운 존재로 다가온다. 안경모 연출은 “노동 상실로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파괴되는지,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타인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연대의 가능성이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는 미국 노동운동의 이정표가 된 켄터키주 할란카운티 탄광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1976년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바버라 코플의 <할란카운티 USA>를 모티브로 만들었다. 유병은 연출은 “이 작품은 광화문 촛불집회 한가운데서 들었던 민중가요 ‘Which side are you on’(당신은 누구 편인가요?)에서 비롯됐다. ‘아이 아빠로서 훗날 아이에게 무엇을 보여줄까’라는 생각에서 이 작품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이 노래는 1931년 만들어진 민중가요로 당시 할란카운티 광부 노동조합을 조직한 샘 리스의 아내 플로렌스 리스가 작곡한 노래다. 1930년대 할란카운티 탄광 지대는 탄광 노동자들이 부당한 노동조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유혈의 할란’(Bloody Harlan)이라는 아픈 별칭을 갖게 됐다. 그런 악명에도 노동조건은 수십년이 지나도록 개선되지 않았다. 여전히 탄광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몫은 광산 수익의 10%에도 못 미쳤다. 1973년 할란카운티 브룩사이드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 조합원들과 그 가족들은 부당한 노동조건과 주거환경을 타파하려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에 들어간다. 기업주는 파업을 저지하기 위해 노조와 노조원을 이간질하는 등 무자비한 방해 공작을 펼친다. 13개월의 지난한 투쟁은 앳된 20대 광부의 죽음을 계기로 노사타협으로 마무리된다.
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 공연 장면. 이터널저니 제공
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는 연극 <스웨트>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와 인종 문제를 다룬다. 주인공인 백인 다니엘과 흑인 노예 라일리는 뉴욕으로 가다 만난 할란카운티 노조위원장이 광산회사 사장의 음모로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다니엘과 라일리가 유품을 전달하기 위해 할란카운티에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할란카운티에서 광산회사는 법률대리인을 앞세워 공작을 벌이고, 노동자는 노-노 갈등을 키우기도 한다. 눈앞에 보이는 임금 인상에 연대가 무너지기도, 투쟁과 가정 사이에서 고뇌를 겪기도 한다. 뮤지컬은 노동자의 승리로 끝이 난다. 사회적 약자들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섯명이 희생이 따랐다. 모두 사회적 약자였다. 이런 희생은 서로 연대해 자신보다 힘없는 사람을 위해 싸우는 것, 그것이 가치 있고 좋은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
뮤지컬 <1976 할란카운티> 공연 장면. 이터널저니 제공
유병은 연출은 “할란카운티 이야기를 통해 ‘정의로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마지막에 뭔가 희망을 찾는 모습에서 관객이 후련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악역들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 뮤지컬에서 총에 맞아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영상 텍스트엔 ‘악역들은 마치 바퀴벌레처럼 죽지 않고 살아서 재판 중’이라고 나온다. 아이러니하지만 현실적인 결말인 셈이다. 뮤지컬은 연대를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 다니엘은 자신과 관계있는 노예 라일리를 위해서 앞장서지만 할란카운티 노사 문제를 놓고선 머뭇거린다. 마을 사람들은 부당한 회사에 맞서 뜻을 함께하지만, 그들을 도우러 온 라일리에게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편견을 갖는다. 등장인물은 순간순간 이런 갈등을 겪지만, 결국 자신의 이익을 접고 연대를 통해 어려움을 헤쳐나간다. 유병은 연출은 “촛불시위에서 우리 사회가 느낀 게 있었다. 하나로 뭉치기 힘든 다양한 이들도 한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면 결국 승리한다는 것”이라며 “뮤지컬에서 광부들이 승리한 힘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물론 그 과정에는 개개인의 결단과 희생이 필요했다. 우리는 혐오와 편견에서 벗어나 서로 연대할 수 있을까? <스웨트>와 <1976 할란카운티>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화두다. 정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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