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아프리카 등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에 대해 프란츠 파농이 쓴 역사적인 대작의 제목이다. 이 표현을 한반도에 적용해 볼 때, '한반도에서 저주받은 자', '한반도에서 가장 저주받은 자'는 누구일까?
남북한의 적대적 상황 때문에, 남한에서 '빨갱이'로 저주하는 사람을 북한에서는 '혁명열사'로 칭송하고 있다. 반대로 북한이 '반동분자'로 저주하는 사람을 우리 사회에서는 '반공열사'로 칭송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저주받은 사람이 있다. 그는 조선공산당의 상징인 박헌영이다. 그는 당연히 우리사회에서 '빨갱이의 괴수'로 저주받고 있다. 헌데 북한도 그를 '미제국주의의 간첩'이라고 저주하며 사형시켰다.
한반도에서 가장 저주받았으며, 한반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복권될 비극적인 인물, 그가 바로 '조선의 레닌'이라고 불렸던 박헌영이다. 한국전쟁 당시 전설적인 지리산 빨치산 부대인 <남부군>을 쓴 이태는 김일성의 남로당 숙청과 관련해, 휴전 후인 1953년 9월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지리산을 내려오다가 사살 당한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을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이라고 썼다('손호철의 발자국' 17. 전북 남원 지리산, <한국일보> 2020년 11월 30일자). 하지만 이현상은 죽은 뒤에라도 북한으로부터 혁명영웅 대접을 받은 반면, 박헌영은 미제간첩이라는 오명을 썼다. 이 점에서 그는, 한 연구자의 표현대로 '남과 북 모두의 역사적 트라우마'다.
충남 예산군 신양면 의용소방소 옆길로 들어가면 커다란 주차장과 면사무소가 나타난다. 20세기와 함께(즉 1900년에) 가까운 예산군 광시면에서 양반집 서자로 태어난 박헌영이 어릴 때 자란 곳이다. 바로 앞 소시장에서 어머니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엄청나게 큰 국밥집을 운영했다고 한다. 소시장 뒤로 돌아가면 박헌영이 소를 몰고나와 풀을 먹이며 책을 읽던 뚝방길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30리길을 걸어 다닌 대흥초등학교에는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떠나며 심은 소나무들이 나를 맞았다.
그는 경성고보(경기고등학교)로 진학해 <상록수>를 쓴 심훈과 동기로 가깝게 지냈고, 3‧1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민족해방과 사회혁명을 위해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 조선공산당 창당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로 인해 구속됐지만, 그가 모진 고문에도 철저하게 조직의 비밀을 지켰고 감옥에서 자신의 대변을 먹는 등 미친 사람 흉내를 내서 병보석으로 석방된 것은 전설이 됐다.
그는 병 요양 차 두만강 근처에 머무르다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도주, 모스크바에서 체계적인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고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에도 해외로 나간 이유가 정신병 치유를 위해서였다고 버텨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량을 받았다. 1939년 살인적인 감옥생활을 버텨 만기출소한 뒤 그는 광주 벽돌공장 노동자로 위장해 생활하며 자하조직 재건을 모색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과 함께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자, 당연히 박헌영은 최고지도자인 책임비서에 선출됐다. 박헌영은 당대 최고의 이론가이자 조직가였지만 대중적 정치인 스타일은 아니어서, 일반 대중들에게는 이승만, 김구와 같은 명성이나 여운형과 같은 인기를 얻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해방 1년 뒤인 1946년 8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중 자본주의 지지는 14%에 불과한 반면 70%는 사회주의를, 7%는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조직인 전평과 전농을 거느리는 등 가장 잘 조직된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미군정은 1947년 사회주의를 저지하지 않으면, 그가 남한의 대통령이 될 우려가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아니 그는 남한만이 아니라 남북을 포괄하는 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자였다. 해방 직후 김일성이 박헌영과 처음 만났을 때, 38선 북쪽에 공산당 분국을 만들고 싶다고 부탁할 정도로 김일성보다 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승만과 김일성은 승자로, 박헌영은 비극적인 패자로 귀결되고 말았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격동하는 해방정국의 정세를 잘못 판단하는 등 그의 주체적인 대응에 일정한 책임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조결정론'이란 비판을 받을지 모르지만, 미국과 소련이 각각 남한과 북한을 분할 점령하고 체제 대립으로 치닫기 시작할 때, 그의 혁명은 시작부터 실패하도록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우연적 사건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들이라는 시각에서 역사적 가정을 내세운 분석들이 유행하고 있다. 만일 북한을 미국이 점령하고 남한을 소련이 점령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당연히 남한의 승자는 박헌영이, 북한의 승자는 조만식 등 우파인사 누군가가 됐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목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한 혁명을 막고, 좌파지지 여론이 근 80%에 달하는 남한의 민심을 분쇄해 친미적인 우익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미국의 공식적인 군정사는 "질서 있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한국이 한국민들을 기쁘게 하고 이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내는 것보다 중요했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박헌영이 이끄는 좌파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자신들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분단을 주도했으면서도 소련이 이를 주도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트려 여론을 오도했고,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소련의 지시를 받는 신탁통치 찬성론자로 몰아갔다. 또 많은 사람들이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위조지폐(정판사) 사건 등을 통해 탄압을 받게 된 그는 북한으로 올라갔지만, 그곳은 소련이 지도자로 선택한 김일성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한국전쟁에서 박헌영의 기반인 남한을 '해방'하는 데 실패하자, 김일성은 이에 대한 희생양으로 그를 숙청하고 처형했다. 그것도 '미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죄명을 씌워서 말이다. 물론 박헌영은 동지들이 이승만에게 죽어가고 많은 민중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인민군이 남하하면 "이에 맞춰 20만 명의 지하남로당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등 '남침'을 적극 주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그는 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의 비극에 많은 책임이 있다. 그 동기는 이해가 되지만, 한국전쟁은 있어서는 안 되는 민족적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책임이 '미제의 간첩'이라는 누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는 '실패한 혁명가'이지 간첩은 아니다. 못된 것만 배운다고, 김일성은 트로츠키를 '서구제국주의의 스파이'로 몰아 숙청한 스탈린에게 배운 것이다. 게다가 이승만은 최대 정적이었던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죽였으니, 남북한이 똑 닮은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 오기 훨씬 전부터 살아 나갈 수 없는 신세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재판은 요식일 뿐, 어떠한 최후진술도 너희들의 각본을 뒤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부터 말하겠다.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에 있을 때, 아니 그 훨씬 전부터 미국사람들과 교분이 있었다. 그 교분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 통일을 위한 차원이지 결코 간첩 행위가 아니다. 남조선에서 나는 미군정 고위 장성들을 만나 내가 통일조국의 최고책임자가 되면 미국과도 국가정책을 협의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다양한 경로를 거쳐 전해진 박헌영의 최후진술의 핵심 부분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 중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다"만 잘라내서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임을 시인했다고 호도했다.
박헌영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를 따라 북한으로 올라간 남로당(남조선노동당) 계열은 줄줄이 처형을 당해야 했고, 토벌군의 끈질긴 토벌작전에도 살아남은 전설적인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도 지리산에서 박헌영계라는 이유로 사령관직을 박탈당하고 버려져 토벌군에 사살당해야 했다. 그의 아들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속세를 떠나야한다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어린나이에 머리를 깎아야 했고, 스님이 된 뒤에도 오랫동안 가족사를 숨기고 살아야 했다(그가 이제는 조계종 원로 의원이자 최고품계인 대종사에 오른 원경스님이다). 게다가 우리 일부 운동권까지도 북한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박헌영을 미제의 간첩으로 매도하는 한심한 사태가 벌어졌다.
박헌영은 조선의 레닌이라고 불리는 공산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치열한 독립투사였다, 한 중립적 연구에 따르면, 일제 때 독립운동으로 구속된 사람을 이념적으로 분류하자 90%가 '좌파'일 정도로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은 좌파였다. 아니 그는 일제 강점기에 김구, 이승만처럼 외국이 아니라 국내에 남아 활동한 운동가, 특히 일제에 체포되어 혹독한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형을 살고 나온 운동가 중,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치열하게 투쟁하고도 해방 때까지 살아남은 몇 되지 않는 항일투사 중의 한 명이었다.
박헌영의 평가와 관련, 기이한 사실이 있다. 서슬 퍼런 유신 시절, 갑자기 박헌영의 측근 중 한 명으로 일본에 살고 있었던 박갑동이 <중앙일보>에 남로당과 박헌영 이야기를 연재해 독자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박갑동이 밝힌 바로는, 자신의 좌익 경력 때문인지 아니면 김일성을 비판하기 위해서인지, 박정희가 박갑동을 직접 청와대로 불러들여 "박헌영 선생 이야기를 써 달라"(박정희는 '박헌영 선생'이라고 존칭을 썼고 박헌영이 해방 후 발표한 '2단계혁명론'인 '8월 테제'에 감동을 받아 자신의 세계관이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고 부탁한 뒤 그 앞에서 이건희를 불러 지면을 주고 최고대우를 해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세상이 민주화되면서, 노무현 정부는 조선공산당도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을 인정하고 박헌영의 부인이었던 주세죽, 동지였던 김단야에게 훈장을 줬다. 하지만 박헌영은 자발적 월북, 한국전쟁의 책임 등을 이유로 훈장추서가 무산됐다. 북한의 주장대로 그가 미제의 스파이였다면 훈장을 줬을 것인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북한의 스파이 주장을 우리 정부도 믿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박헌영과 마찬가지로 자진 월북해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의열단장 김원봉의 예가 보여주듯이, 그의 '법적인 복권'과 서훈은 실증법과 국민정서상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화 '암살'의 흥행과 그가 만든 조선의용대가 국군의 뿌리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그리고 그의 고향에 지어진 의열기념관이 보여주듯이, 김원봉은 역사적으로는 복권이 됐다고 볼 수 있다. 박헌영에게 필요한 것은 이 같은 '역사적 복권'이다. 그의 '역사적 복권'은 단순히 박헌영 개인의 복권이 아니라 일제와 해방 공간에서 생명을 걸고 민족해방과 사회혁명을 위해 투쟁했던, 수많은 남로당원 등 '비(非)김일성 계열' 공산주의자들과 '역사적으로 화해'하고 이들을 '역사적으로 복권'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도 그에게 덧씌운 누명에 사과하고 그를 복권시켜야 한다(참고로, 우리 정부는 이승만 정권이 북한 간첩으로 몰아 죽인 조봉암에 대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하고 복권시켜 줬다.) 박헌영이 남북한 모두에서 '역사적으로' 복권될 때, 해방 정국의 비극적인 이데올로기 전쟁은 비로소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수는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 한 때 "북한으로 쳐들어가 김일성의 목을 따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해병대 특수부대인 UDT에 지원했던 원경스님이 주지로 있는 평택 만기사에 들어서면 이 같은 글이 우리를 맞는다. 이곳에는 이정(박헌영의 호)을 추모하는 추모탑이 있다. 탑 뒤편에는 원한을 푸는 탑이라는 의미로 '해원탑'이라고, 좌우에는 '세계일화(一和)', '남북통일'이라고 쓰여 있다.
"손 교수, 이정 선생과 여운형 선생, 이승만 선생 기일이 모두 같은 7월 19일 인 거 아세요?"
탑 앞에서 원경스님이 물었다. 해방 정국에서 좌파, 중도좌파, 우파를 대표하는 세 정치인이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니, 놀라운 이야기이다.
"그게 정말이에요?"
"예. 게다가 세 분이 9년 터울로 돌아가셨어요."
여운형이 1947년, 박헌영이 1956년, 이승만이 1965년에 죽었으니, 맞는 이야기이다.
미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원통하게 죽어간 박헌영의 해원탑을 올려다보고 있자, 흘러간 옛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이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박헌영은 일제시대 정신병자 흉내를 내서 감옥에서 풀려나 부인 주세죽의 고향인 두만강가에서 요양을 하다가 기회를 틈타 강을 건너 소련으로 도주했다. 이 소식이 크게 보도되자, 김용환 시인이 그를 '내 님'으로 은유해서 만든 것이 바로 이 노래라고 한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마침 오늘이 양력으로 박헌영이 태어난 지(1900년 5월 28일) 121년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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