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짱다리에 척추 장애인인 제인 애덤스(1860~1935)가 쓴 <헐하우스에서 20년>은 평생 계급을 넘는 대동사회를 추구한 삶의 전반을 기록한 점에서 가장 중요한 고전이라는 평가도 받는 책이지만, 한국에서는 그 책이 나온 지 거의 1세기가 지난 2008년에야 번역되었다. 그것도 완역이 아니라 부분역인데 그 점을 전혀 밝히지 않고 있어 문제다. 특히 그의 삶 후반부의 예술 활동과 러시아 혁명에 대한 부분을 생략해서 문제다. 게다가 원저와 달리 번역서 표지에는 ‘미국 여성 최초 노벨 평화상 수상자 제인 애덤스의 자전적 에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지만, 노벨상을 받은 것은 1931년이고 그 책의 내용은 애덤스가 1889년에 만든 헐하우스 초반의 20년에 그치며, 1910년부터 그가 죽은 1935년까지의 마지막 26년 세월에 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 26년은 애덤스가 미국의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평화운동에 헌신하며 사회학을 개척한 기간으로, 노벨상 수상 공적과 깊게 관련돼 있는 사회적·학문적 연찬의 시기였는데도 말이다.
또한 1세기 전에 미국인이 쓴 책이니 지금 한국인이 읽을 때 알아야 할 이야기가 더해졌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헐하우스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된 원저의 서문을 쓴 미국인이 헐하우스가 ‘급진적’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고자 할 따름이라고 하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헐하우스는 분명히 급진적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애덤스 자신이 말하듯 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 그녀는 미국의 전통인 프래그머티즘에 충실한 사회개혁가로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애덤스는 존 듀이와 함께 민주주의를 프래그머티즘과 시민적 행동주의라는 관점에서 다시 정의했으며, 특히 권리보다는 의무에 중점을 두었다. 애덤스와 그 동지들을 효율성에 더 신경 쓰는 현대인과 구별하는 두가지 주요 관점은 첫째는 노동조합에 대한 계획적 지원을 요청한 것처럼 정치권에 국한되었던 민주적 구조와 관행을 사회경제적 삶으로 확장시킬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며, 둘째는 개인주의 관점을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이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적 윤리를 요구한 점이었다. 애덤스는 책의 처음부터 자신이 척추 장애인이며 안짱다리에 못생겼다고 어린 시절의 콤플렉스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 충격을 준다. 게다가 고전을 읽어도 삶의 지혜가 생기지 않아 서슴지 않고 읽기를 포기했다고도 말한다. 신학교에서 사귄 친구 중 한명이 뒤에 대한제국의 의료 선교사로 건너가 명성황후의 병을 성공적으로 치료한 덕에 황실 주치의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뒤로 그 친구가 어떻게 되었고, 조선의 식민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언급이 없다. 그 친구는 조선 최초의 여성 의료 선교사인 애니 엘러스(1860~1938)로 1886년에 조선에 와서 선교사 댈절 벙커(1853~1932)와 결혼하고 정동여학당(현 정신여고)을 세웠으며, 양화진에 묻혀 있다.
미국 사회운동가 겸 여성참정권운동가, 평화운동가였던 제인 애덤스의 1905년 모습. 위키미디어
레프 톨스토이의 <나의 종교>와 초기 기독교에 매료된 그녀는 1886년 여름 장로교회에서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았고, 주세페 마치니의 <인간의 의무>를 읽고 민주주의가 사회적 이상이라는 믿음을 평생 간직했다.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을 읽고 결혼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애덤스는 영국 여행 중에 본 토인비 홀의 주민정착 사업에서 영감을 얻어 1889년 시카고 슬럼가에 주거 정착 사업을 위한 헐하우스를 세웠다. 초기 기독교계에서처럼 다양한 계층이 사회적으로 서로 어울리며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는 꿈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 목표 중 하나는 특권적이고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대다수 사람들의 실생활을 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곳 거주자들은 질병치료와 육아 및 교육 토론을 시작하였고, 이어 예술과 체육활동, 도서관 및 박물관 등으로 확장했다. 노동단체와 다른 개혁단체들과 함께 최초의 소년심리원법과 공동주택법, 아동노동의 폐지, 노동자의 임금과 1일 8시간제, 공장 검열 등을 위해 노력했다. 또 이민자와 흑인에 대한 사법제도의 정립을 위해 힘썼고, 가난과 범죄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 작업을 제안했으며, 여성의 참정권 획득을 옹호하는 등 1930년대의 개혁을 이끌었다. 특히 헐하우스는 문화·계층·교육의 좁은 경계를 허물고 전통적인 사회봉사 시설을 넘어 지역 예술센터로 성장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공동체와 이념이 서로에게서 배우고 집단행동의 공통 근거를 모색할 수 있는 중립적인 공간으로서 시민사회를 위한 기반이 됐으며, 개인을 그 직업이나 직위에 맞게 만드는 기존의 교육제도에 도전하여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공간, 시간, 도구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집단적 상호 작용, 상호 간의 자아 발견, 레크리에이션과 상상력을 통해 도시의 다양성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 예술은 다양성과 다문화주의를 통한 문화적 정체성의 지속적인 재창조에 기초하여 고정된 사상을 교란하고, 건강한 사회에 필요한 다양성과 상호 작용을 자극하면서 공동체 비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애덤스는 평화운동에도 앞장섰다. 1898년 미국의 필리핀 합병에 반대하여 반제국주의 연맹에 가입하고 진보당을 지지했으며, 1899년에는 스페인-미국 전쟁에 반대했다. 1914년 이후 새로운 국제 여성 평화운동에 참여해 미국의 전쟁 개입에 반대했고, 1915년에는 여성 평화당의 전국 의장에 선출되었다. 또, 그해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여성대회를 주재하고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선언을 모색하기 위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전쟁에 대항한 최초의 중요한 국제적 노력이었다. 그 뒤에도 애덤스는 세계 평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특히 1917년 미국의 참전과 함께 보수세력들에게 반미 평화주의자로 비난을 받았지만, 애덤스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톨스토이와 듀이의 영향을 받은 애덤스는 민주주의, 사회 정의, 평화를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인간의 친절, 연대, 시민적 우정을 훼손하고 전세계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대격변이라고 전쟁을 저주한 애덤스는 미국의 개입주의, 팽창주의,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에 당시 연방수사국(FBI)은 제인 애덤스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간주했다. 그러나 1931년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녀는 노벨평화상 수상 후 4년 뒤인 1935년, 75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헐하우스는 일리노이대학교의 캠퍼스 건설을 위해 대부분의 건물이 헐렸고, 그 활동도 2012년에 끝났다. 애덤스는 생전에 대학에서 공개 강의를 했으나 대학과의 제휴는 거부했다. 자신의 목표가 대학 밖의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이고, 나아가 대학의 통제를 바라지 않은 탓이었다. 그럼에도 애덤스는 헐하우스 창립 후 3년 뒤에 개설된 시카고대학교 사회학과를 비롯하여 미국 사회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래서 2001년 미국사회학회의 회장이었던 조 페이긴은 애덤스를 미국사회학의 핵심 창설자로 부르고, 사회학이 다시 애덤스와 같은 사회활동가의 뿌리와 사회 정의에 대한 헌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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