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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참으로 기묘한 이야기, 타이에서 하룻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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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효의 지구 둘레길
지구 떠돌며 많은 곳에서 숙박한 나
타이에서 묵은 그 호텔은 잊을 수 없어
해 저문 저녁에 도착한 우돈타니
묵을 곳 못 찾아 고생하는데 눈에 들어온 한 호텔
박제된 사슴 머리, 공포심 불러일으키는 직원 등
그날 밤 호텔 방에서 겪은 갖가지 이상한 일들
시차이 호텔 302호실과 수신 전용 전화기. 사진 노동효 제공
시차이 호텔 302호실과 수신 전용 전화기. 사진 노동효 제공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1408>의 주인공 마이크는 유령 출몰지를 찾아다니는 작가다. <유령호텔 10선>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숱한 호텔과 모텔에서 밤을 보냈을 것이다. 나 또한 지구를 떠돌며 참 많은 곳에서 잤다. 마이크처럼 <유령무덤 10선>, <유령등대 10선>을 쓸 목적으로 귀신들린 장소를 찾아다니진 않았지만 종종 이상하거나 야릇한 장소에서 묵기도 했다. 타이 우돈타니의 ‘시차이 호텔’은 내가 그동안 묵은 장소 중 가장 기이한 숙소였다. 방콕에서 기차를 타고 우돈타니에 도착한 건 해 저문 저녁이었다. 우돈타니는 라오스 수도와 가까워서 라오스 상인이 드나들며 갖은 공산품을 수입하는 상업도시다. ‘어디서 잘까?’ 볼거리가 많은 도시도 아닌 탓에 하룻밤만 지내고 이동할 작정이었다. 역에서 가깝기만 하다면 어디라도 좋았다. 스콜성 비가 지나간 후인지 도로는 젖어 있었다. 거리는 한산했고, 밤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기차역을 빠져나왔다. 타이 남쪽에서 북쪽까지 쏘다녔지만 우돈타니는 처음이었다. 맞은편 길 따라 네온사인이 반짝거렸다. 캐리어를 끌고 질척거리는 길을 건넜다. 드문드문 호텔과 게스트하우스는 있는데 숙소마다 빈방이 없다고 했다. 야시장용 천막이 늘어선 공터, 알록달록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다. 이런, 지역축제 기간이구나….
시차이 호텔 로비에 걸린 박제된 사슴 머리. 사진 노동효 제공
시차이 호텔 로비에 걸린 박제된 사슴 머리. 사진 노동효 제공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엔 숙소가 많을 테니 방이 있지 않을까, 하고 방향을 틀었다. 인근 골목을 다 뒤졌지만, 방이 찼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마침 식당에서 나오는 여행자 커플이 눈에 띄었다. 스페인에서 왔다는 그들에게 어디서 묵느냐고 물었다. “어딜 가도 빈방이 없어. 우리도 뚝뚝 타고 여기서 한참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았거든. 식당도 없어서 다시 여기로 나왔다니까.” “그럼 나도 너네 묵는 곳으로 가야겠다.” “이런 어째, 우리가 체크인하면서 그 호텔도 다 찼거든….” 두 사람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솟아오르던 희망이 거품처럼 터지며 사라졌다. 그들과 헤어져 좀 더 멀리 가보기로 했다.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든 길은 을지로 공구 골목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해 지고 가게가 문을 닫으면 인적 끊기는 거리. 얼마나 걸었을까, 도로변에 우뚝 솟은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낮은 건물들과 대비되어서일까, 칠층인데도 고층건물처럼 보였다.
3층 복도 끝에서 본 시차이 호텔 간판과 길 풍경. 사진 노동효 제공
3층 복도 끝에서 본 시차이 호텔 간판과 길 풍경. 사진 노동효 제공
시차이 호텔(Sri Chai Hotel). 간판이 붙어있었지만 이상했다. 칠층인데, 삼층 복도까지만 불이 들어와 있다. 영업 중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문을 젖히고 들어섰다. 호텔인데 알루미늄 새시 문이라니! 로비 천정엔 침침한 형광등이 켜져 있었고, 박제된 사슴머리가 벽에 붙어 있었다. 이 분위기는 대체 뭐지? 승강기엔 ‘가동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왠지 지상이 아니라 지하로 운행되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음침했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엑소시스트>를 쓴 듯한 소설”이라며 스티븐 킹이 찬사를 보낸 <폴링 엔젤> 원작의 영화 <엔젤 하트> 마지막 신이 떠올랐다. 지하로 한없이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헬로우? 프런트엔 사람이 없었다. “헬로우”만 반복하며 어쩔까 망설이는 사이 몇 분이 흘렀다. 그만 나갈까, 하는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화교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나는 방이 있냐고 물었다.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단어를 줄여 “싱글 룸?” 하고 다시 물었다. 사내가 열쇠를 챙기려고 옆을 보았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사내의 오른쪽 눈동자는 옆으로 돌아갔는데, 왼쪽 눈동자는 그 자리에 멈춘 채 나를 빤히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듯 충격이 지나간 후, 나는 의안(義眼)일뿐이라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앞장선 사내 뒤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갇혔던 사설 감옥의 복도 같았다. 다른 점은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것. 인기척이 없었다. 사내가 몇 개의 방을 지나 문을 열었다.
가동하지 않는 시차이 호텔의 엘리베이터. 사진 노동효 제공
가동하지 않는 시차이 호텔의 엘리베이터. 사진 노동효 제공
소파, 탁자, 티브이(TV), 옷장. 그리고 침대 두 개. 싱글 룸치곤 넓은 방인데 가구들이 버린 물건을 주워온 폐품 같았다. 문짝 없이 속을 드러낸 옷장. 다이얼 없는 수신전용 전화기. 찢긴 이불….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지쳐있었고, 숙소를 찾아다니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돌아다닌다고 해도 남은 방이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 하룻밤인데, 뭘. 사내의 뒷모습을 지켜본 후 복도를 둘러보았다. 칠이 벗겨지고 먼지가 앉아 노릇하지만 원래는 하얀 벽이었으리라. 흠집투성이지만 복도는 방금 닦은 듯 매끈했다. 너무 깨끗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방으로 들어와 사내가 두고 간 수건을 챙기고 욕실 등을 켰다. 형광등이 깜박. 깜박. 점멸하는 동안 눈에 들어온 풍경은 야릇했다. ‘철봉’이 천장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가운데 철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연쇄살인범 소재의 영화 세트 같았다. 물기를 머금고 있던 복도 바닥이 떠올랐다.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뭔 소리라도 들으면 안심이 될까, 티브이(TV)켰다. 브라운관 화면은 지글거리며 어떤 영상을 보여주는데,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볼륨을 올려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솜이 삐져나온 소파 뒤의 문을 발견했다. 옆방으로 연결된 나무문이었고 잠겨 있었다. 근데 저 무늬는 뭐지?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친 흔적처럼 누군가의 손바닥이 찍혀 있었다. 색이 바랬지만 분명, 손바닥이었다. 그때, 갑자기 자지러지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히히히히히히히. 비명인지 웃음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투숙객이 또 있었던 걸까? 사내가 내 방 열쇠를 뺄 때 옆 호실들 열쇠는 그대로 꽂혀 있었는데…. 나무문 건너편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박제된 사슴 머리, 고장 난 엘리베이터, 외눈의 사내, 손바닥 자국에 기괴한 웃음소리까지 겹치자 심란한 기분이 극에 달했다.
옆방으로 통하는 문에 찍힌 손바닥 자국.
옆방으로 통하는 문에 찍힌 손바닥 자국.
담배라도 한 대 피울까. 티브이(TV) 옆에 유리잔과 유리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나는 재떨이를 옮기려다가 표면에 박혀있는 마크를 보게 되었다. SK. 그리고 마크를 둘러싼 알파벳 Sri Kim Hospital. 유리잔에도 똑같은 마크가 찍혀 있었다. 알루미늄 새시 문, 하얀색의 벽, 교실 복도 같은 바닥. 이 건물은 한때 병원이었구나. 방은 진료실과 병실이었으리라. 확인하기 위해 면 수건을 펼쳤다. 푸른 멍 자국 같은 글씨는 희미했지만 분명 ‘Sri Kim Hospital’이었다. 그 방에서 잤느냐고? 잤다. 병원이었다는 걸 알게 된 후론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킹덤>을 떠올리며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지금껏 경험하지 않은 어떤 일이 벌어지기를. 그러나 잠들기 전까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불 위에 엎어진 채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개 한 마리가 자꾸만 내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머리를 가랑이 사이로 넣었다가 빼고, 넣었다가 빼고…. 잠이 깼다. 깨고 보니 나는 웅크린 채 사타구니 사이에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꿈속에서 ‘개’라고 여겼던 건 ‘나의 손’이었다. 순간, 무언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는 ‘삶이라는 환상’ 속에서 ‘나’와 ‘외부 세계’를 분리하지만 잠에서 깨듯, 이 삶이라는 환상에서 깨면 나와 우주가 결국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아닐까?
시차이 호텔 로비에 걸린 박제된 사슴 머리와 지도. 사진 노동효 제공
시차이 호텔 로비에 걸린 박제된 사슴 머리와 지도. 사진 노동효 제공
창가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잠을 깨운 건 한기(寒氣)였다. 창이 열려있던 걸까? 커튼을 젖혔다. 순간 나는 아연했다. 커튼으로 가려놓았을 뿐 안과 밖의 경계, 유리창이 없었다. 불가해한 호텔이었다. 찢어진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또 다른 꿈이 찾아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꿈이었더라? 잡힐 듯, 잡힐 듯…. 꿈의 실밥을 낚아챘다. 꿈이 딸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잠금 누름쇠를 누른 후 방문을 닫고 나온다. 아차! 방 열쇠를 안에 뒀다는 걸 알아챈다. 어떤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삶이란, 열쇠를 안에 두고 방문을 닫아버린 상태와 같아. 자, 이제 어떻게 들어갈래?’ 종종 그 호텔이 생각나곤 한다. 구글 지도에서 우돈타니를 펼치고 ‘시차이 호텔’을 검색한다. 분명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있는데, 그 이름의 호텔은 보이지 않는다.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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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31, 2020 at 08:05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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