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체 게바라의 밀림에서 마법의 씨앗 뿌리는 페드로 가족 - 한겨레

jabaljuba.blogspot.com
[토요판] 서필훈의 얼굴 있는 커피
⑧볼리비아 로스 로드리게스 농장

게바라 숨진 볼리비아 정글 지역
건조한 땅에 커피재배 페드로 가족
인디오 소농과 기술교육 프로그램
‘내일의 태양’ 프로젝트 운영해

이웃은 로스 로드리게스 열매 보고
우리도 마법의 씨앗 달라 하지만
7년을 한결같이 교육에 매진하는
페드로 파블로는 게바라와 한통속

울창하게 자란 커피나무 속의 페드로 파블로. 서필훈 제공
울창하게 자란 커피나무 속의 페드로 파블로. 서필훈 제공
벌써 7년 전 일이다. 볼리비아 라파스 공항에 비행기가 내리자마자 속이 메슥거렸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도 30시간이 지났다. 정말 멀다. 지구 반대편까지 온 느낌이다. 곧이어 머리가 아프고 숨이 가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다. 고도를 확인해 보니 해발 4300m. 입국 절차를 마치고 나왔는데 덩치 큰 백인 남성이 산소마스크를 하고 공항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귀가 멍하고 다리에 힘이 없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 호텔로 들어왔는데 짐을 방으로 옮기자마자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고 내다본 창문 밖 라파스 시가는 마침 짙은 주홍빛 황사가 내려앉아 다른 행성처럼 신비하고 낯설었다. 다음날 볼리비아의 가장 중요한 커피 산지 카라나비로 향했다. 우선 4800m 고지를 넘어야 했다. 도로 옆으로 펼쳐진 산봉우리에 만년설이 가득했고 하늘은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숨쉬기가 어려워 눈이 자꾸 감겼다. 고개를 간신히 넘었지만, 위기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죽음의 도로’를 지나야 했다. 높이 솟은 절벽 중턱을 깎아 만든 좁고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인데 가드레일도 없고 차바퀴 한 뼘 너머는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다. 가끔 차가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는데 차량을 찾아내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볼리비아 커피가 도대체 뭐길래…. “볼리비아 커피를 위해서” 카라나비는 작은 도시였지만 커피 중심지답게 커피를 실어 나르는 트럭들로 분주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활력이 넘쳤다고 한다. 볼리비아 커피는 최근 생산량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전체 커피 생산량이 브라질 중간 규모 농장에 불과하다. 그래서 국제 커피 시장에서 볼리비아 스페셜티 커피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커피 생산량이 감소하는 이유는 첫째, 커피 가격이 낮다 보니 커피 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늘어나는 데 있다. 커피 농사를 포기한 생산자는 일년에 세번 수확하고 커피보다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코카 재배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다. 둘째, 지구 온난화에 따른 이상 기후는 커피 농사의 성패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강우 시기와 강우량에 변화를 가져왔고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대폭 감소시켰다. 수확량이 줄어들어 수입이 부족해진 생산자는 생활비를 위해 다른 일을 찾아 나선다. 커피 생산자가 이렇게 커피밭에서 멀어지면 다음해 수확량과 품질은 당연히 떨어지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페드로 가족이 건조한 사마이파타 지역에 어린 커피 묘목을 심은 모습. 서필훈 제공
페드로 가족이 건조한 사마이파타 지역에 어린 커피 묘목을 심은 모습. 서필훈 제공
로스 로드리게스(Los Rodriguez) 농장을 운영하는 페드로 가족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 커피 재배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아버지인 페드로는 원래 커피 가공 및 수출업에 30년간 종사하다가 커피 생산자가 대거 커피 재배를 포기하던 10여년 전부터 직접 커피 농장을 시작했다. 오랫동안 애정을 갖고 해오던 커피 일을 잃고 싶지 않았고 볼리비아 커피가 이대로 세계 커피 지도에서 사라지게 둘 수 없었다. 페드로는 볼리비아가 가진 뛰어난 자연조건과 커피 시장에서의 희소성을 바탕으로 스페셜티 커피를 재배하고 판매해서 볼리비아 커피의 전통을 이어나가려 한다. 딸인 다니엘라는 농장의 재정과 생두 판매, 대외업무를 맡고 있어서 지난 7년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다. 페드로 가족은 처음부터 과학적인 영농 기술을 지역의 인디오 커피 생산자와 공유하고 함께 발전시켜 나갔다. 그 중심에는 아들이자 30대 초반의 젊은 커피 생산자, 페드로 파블로가 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최고의 농업대학으로 유명한 온두라스 사모라노(Zamorano) 대학을 졸업했다. 페드로 파블로는 훤칠한 키에 미남이고 성격도 쾌활해 누구와도 금방 친해지는 친화력을 가졌다. 그는 대학 졸업 뒤 바로 볼리비아로 돌아와 혈기왕성한 20대를 모두 커피 농장에 바쳤다. 또래 친구들이 도시에서 한창 멋 부리고 파티에 몰려다니며 젊음을 만끽할 때 그는 커피밭에서 땀 흘렸다. 한번은 궁금해서 물어봤다. “너도 도시 가서 놀고 싶지 않아?” 너무 재미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니, 난 커피 농장에서 일하는 것이 제일 좋아.” 가족 일이기도 하고 나중에 아버지한테 물려받을 농장이니까 열심히 일하는 게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을 보면 페드로 파블로가 커피 농장을 일구는 일에 제대로 빠져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페드로 가족이 펼치고 있는 ‘내일의 태양’(Sol de La Mañana) 프로젝트는 인근 커피 농장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술교육 프로그램이다. 페드로 파블로가 이 마을 저 마을 찾아다니며 인디오가 대부분인 지역 커피 생산자를 교육한다. 교육비는 없다. 비료와 농약도 대량으로 싸게 사서 이윤 없이 판매한다. 언뜻 이해가 안 가서 이유를 물어봤다. 이번에도 재미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볼리비아 커피를 위해서.” 이 프로그램은 커피 생산자의 영농학교인 셈인데 생산자는 종묘 관리, 재배, 수확, 해충 예방, 가지치기, 재무 관리 등 커피 농장 운영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배운다. 첫 기수 생산자들이 졸업하는 데 7년이 걸렸다. 현재 약 60명의 생산자가 참여하고 있다. 볼리비아 정부는 내일의 태양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고 페드로 파블로에게 조언을 얻어, 카라나비 인근에 대형 커피 종묘 단지를 조성했다. 여기서 기른 어린 커피나무들은 커피 생산자에게 전달할 예정이라고 한다. 수령이 높은 커피나무는 병충해에 취약하고 수확량이 떨어져 커피 생산량 및 농가 소득 감소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하지만 전문적인 영농 지식이 없는 생산자는 건강한 묘목을 가꾸기가 쉽지 않다. 하루는 그가 예전 얘기를 하나 해줬다. 주변 생산자들은 페드로 파블로 농장의 커피나무가 자신들이 기르는 나무에 비해 월등하게 크고 건강하며 열매도 많이 열리는 것을 보고 페드로 파블로가 마법 씨앗을 심어서 그렇다며 질투하고 수군댔다. 페드로 파블로는 그들에게 마법 씨앗이 아니라 과학적인 영농 기법과 농장 관리 결과라고 말하며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만, 생산자들은 그 말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마법 씨앗을 달라고만 요구했다.
마법의 씨앗을 달라던 이웃 생산자는 ‘내일의 태양’ 프로그램의 최우수 졸업생이 되었다. 서필훈 제공
마법의 씨앗을 달라던 이웃 생산자는 ‘내일의 태양’ 프로그램의 최우수 졸업생이 되었다. 서필훈 제공
“일단 믿어야 믿을 수 있다” 어려운 상황을 넘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사람을 믿지 않고 오히려 의심하고 비난할 때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역시나 고리타분하다. “속상했지만 기다렸다.”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되물었다. “뭘 믿고 기다리나?” 이번 대답은 좀 흥미로웠다. “일단 믿어야 믿을 수 있다.” 믿는다는 말에 여러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다. 볼리비아에서 커피 재배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다. 다른 커피 생산 국가에 비하면 역사가 아주 짧은 편이다. 그렇다 보니 축적된 커피 재배 기술도 부족하고 남미 최빈국 정부의 무관심과 무능은 커피 농업의 방치로 이어졌다. 페드로 파블로가 교육에 참여한 생산자들에게 가장 힘주어 이야기한 것은 종묘장을 잘 관리해서 튼튼하고 좋은 묘목부터 확보하는 것이다. 나무가 어릴 때 제대로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하거나 병충해에 시달려 약해지면 나중에 성장해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로스 로드리게스 농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우람한 커피나무가 가지마다 열매를 가득 매달고 자신의 커피밭에서 자라는 것을 본 생산자들은 페드로 파블로의 교육에 더 열심히 참여했고 그제야 정말 고맙다는 말을 꺼냈다. 두번째 목적지는 페드로 가족이 농장을 운영하는 사마이파타(Samaipata)였다. 이곳은 라파스에서 비행기로 산타크루스까지 와서 차를 타고 갔다. 이 지역은 볼리비아 안데스의 동편인데 기후와 식생이 카라나비와 무척 달랐다. 우선 나무가 우거진 정글이 많았다. 사마이파타는 1967년 체 게바라가 게릴라를 이끌고 잠시 점령했던 마을이다. 그는 같은 해 10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정글에서 전투 끝에 상처를 입고 생포되어 다음날 처형됐다. 그가 죽은 산골 마을을 방문하려는 관광객 중 상당수는 사마이파타를 거친다. 이 지역 지방정부는 ‘체 게바라의 길’이라는 관광 코스를 개발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체 게바라는 죽어서도 가난한 이곳 사람들을 건사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마이파타에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히피와 조용한 삶을 원하는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페드로 가족은 전통적인 커피 재배 지역이 아닌 이곳에 커피 농장을 시작했다. 커피 농장은 사마이파타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을 더 들어가야 했다. 농장이 위치한 곳은 주변과 달리 꽤 건조했다. 이런 곳에서 커피가 잘 자랄지 의아했다. 페드로 파블로는 농장의 가장 높은 곳에 저수지를 파서 펌프를 돌려 커피밭 전체에 물을 대겠다는 계획을 말해줬다. 지난 10여년 동안 방문한 커피 농장만 전세계 400군데가 넘는다. 그중 이런 농장은 단 한곳도 없었다. ‘쉽지 않겠다’라고 말하려다가 기대에 부푼 그의 표정을 보고 말을 삼켰다. 우리는 발아래로 펼쳐진 가뭄에 타들어 가는 커피밭을 함께 내려다봤지만 분명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실현 가능성과 성공 여부만으로 가늠할 수 없는 삶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쉽게 잊는 것 같다. 차라리 그게 편하고 이롭다. 현재라는 질서를 거부하면 마주하게 될 고난과 고통은 끔찍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지혜와 이치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우리가 살면서 그런 상황을 조우하지 않도록 하는 조언이다. 하지만 유독 체제와 불화하는 사람이 꼭 있다. 체 게바라도 아니면서. 평소에 불만이 많고 굳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한다. 누가 봐도 안 될 것 같은 일을 무모하게 시도하다가 결국 실패했는데 웃네? 헛것을 봤는지 무언가에 영혼을 사로잡혀 무섭게 파고드는 사람. 그리고 마법 씨앗을 달라는 사람들에게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자며 7년 동안 소농들을 교육하거나 아무도 커피를 심지 않던 건조한 땅에 커피 농장을 일구고 희망을 말하는 사람. 내가 보기에는 다 한통속이다. 나는 로스 로드리게스 농장을 지난 7년 동안 방문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그들을 응원하고 지켜보는 것뿐이다. 사마이파타에서 처음 수확한 커피는 건조한 기후 탓에 커피 열매가 아주 작고 단단했고 어디서도 보기 힘든 농익은 단맛이 일품이었다. 구매용 샘플로 도착한 그 커피를 마시고 마음이 더없이 흡족했다. 멋진 볼리비아 커피를 꾸준히 사용할 수 있어서 고마울 따름이다.
마법의 씨앗을 달라던 이웃 생산자는 ‘내일의 태양’ 프로그램의 최우수 졸업생이 되었다. 서필훈 제공
마법의 씨앗을 달라던 이웃 생산자는 ‘내일의 태양’ 프로그램의 최우수 졸업생이 되었다. 서필훈 제공
체 게바라의 마지막 커피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쓴 일기는 그가 죽은 뒤 20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일반에게 공개됐다. 그는 죽기 며칠 전인 1967년 10월3일 일기에 ‘커피를 쓴 물로 끓였지만, 맛은 기가 막혔다’라고 썼다. 그게 커피를 유난히 좋아했던 그의 마지막 커피였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그래 봤자 나는 “체 게바라가 극찬한 볼리비아 커피 사세요”라고 홍보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 장사꾼일 뿐이다. 볼리비아는 내게 너무 먼 곳인데 커피가 난다. ‘오늘부터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다’로 시작한 일기는 1967년 10월7일 끝났다. 그는 다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것 같다.
서필훈 커피 리브레 대표. 15년 전 핸드 드립 전문점에서 바리스타로 시작해 현재는 로스팅과 생두 사는 일을 맡고 있다. 커피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아름다움과 참상, 희망이 한데 뒤섞여 있기는 매한가지다. 한 잔의 커피 뒤에 숨겨져 있는,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4주에 1번 연재.

Let's block ads! (Why?)




June 27, 2020 at 04:43PM
https://ift.tt/2ZdFHUu

체 게바라의 밀림에서 마법의 씨앗 뿌리는 페드로 가족 - 한겨레

https://ift.tt/3hnW8pl


Bagikan Berita Ini

0 Response to "체 게바라의 밀림에서 마법의 씨앗 뿌리는 페드로 가족 - 한겨레"

Post a Comment

Powered by 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