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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23. 건물점거 운동과 페미니즘 공간의 역사
1981년 시작된 건물점거 운동
베를린 여성운동 기반 만들어
마녀의집·무지개공장·쇼콜라덴
빈 건물과 학교, 버려진 공장을
여성 주거·생활·문화 공간으로
그렇게 태어난 ‘국제여성공간’에서
‘베를린 다이어리’ 쓰였네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희망의 의미를 담은 무지개 공장 건물. 채혜원 제공
‘이 집은 여성들에게 점령되었다!’(Dieses Haus wird von FRAUEN besetzt!) ‘점거된 집에 대한 철거는 없어야 한다!’(Keine Räumung besetzten Häuser!) 1981년 베를린의 동네 크로이츠베르크에서 여성들이 ‘건물점거(Hausbesetzung)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크로이츠베르크는 이주민이 모여 살고 카페와 펍, 작은 상점이 많으며 반자본주의 저항운동의 중심지다. 당시 베를린시 당국은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이 지역에 철거방침을 내렸고 이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점거운동이 시작됐다. ‘스쿼팅’(Squatting)이라고 하는 이 운동은 위법 요소가 있지만, 주민들은 독일 헌법 14조를 근거로 스쿼팅의 위법성을 반박했다. 독일 헌법 14조 2항에 따르면, 소유물은 사용되어야 하며 동시에 모두의 이익에 기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철거 대상 건물에 사는 주민이 주거공간을 지키기 위해 점거한 경우도 있었지만, 사용되지 않고 버려져 있는 빈 건물을 점거한 사례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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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 운영하고 영화관 만들고
1981년 처음 여성 건물점거 운동이 일어났던 헥센하우스의 현재 모습. 23가구로 구성된 건물에는 지금도 여성들이 모여 살고 있다. 채혜원 제공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여성들의 건물점거 운동이 일어난 곳은 ‘헥센하우스’(Hexenhaus)다. ‘마녀의 집’이라고 이름 붙인 이 건물을 점령한 여성들은 여성 건축가가 계획하고 여성 거주민이 생활과 일을 결합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 주택을 꿈꿨다. 1981년 당시 23개 주거용 아파트로 구성된 5층 건물은 거의 비어 있었다. 여성들은 저렴하고 장기적으로 안전한 생활공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점거를 이어갔다. 그 결과, 2년 뒤 여성들은 돈을 모아 비영리협회 ‘헥센하우스’를 설립하고 건물을 매입할 수 있었다. 점거 초기에 계획했던 여성 전용 아파트이자 여성이 계획하고 운영하는 페미니즘 공간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난방 설치 등 건물 수리에 필요한 국가보조금을 받기 위해 헥센하우스 협회는 자조활동을 시작했다. 건물 입구의 가게 공간에 여성 예술가를 위한 스튜디오와 여성 영화 프로젝트 사무실을 꾸리고 게스트룸을 마련했다. 현재 헥센하우스는 6주마다 주민회의를 열고 여성 임차인들이 행정과 관련한 모든 일을 결정한다. 헥센하우스 근처에 있는 ‘무지개 공장’(Regenbogenfabrik)도 1981년 건물점거 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문화공동체다. 당시 한부모 그룹과 노동자, 활동가들이 베를린시의 재개발 사업에 맞서 빈 공장 터를 점거하고 자조사업을 시작했다. 거주자의 일자리를 창출함과 동시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문화센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점거 이후 공동체 회원들은 건물주와 장기임대계약을 맺었고, 건물 수리는 베를린시에서 받은 지원금과 공동체 운영 기금으로 진행했다. 무지개 공장 회원들은 스스로 수익사업을 위해 1989년부터 호스텔 운영을 시작했다. 영화 단체가 입주하면서 영화관도 문을 열었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지역 교회 단체와 대학 학생회의 지원을 받았다. 현재 이곳에는 카페, 어린이집, 목공소, 자전거 수리 공방 등 다양한 공간이 운영되고 있다. 여러 공간 덕에 무지개 공장은 영화 상영, 미술 전시, 음악회, 시 낭송회 등 늘 다양한 행사로 북적이는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무지개 공장의 크리스티네 치글러 매니저는 “베를린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건물점거 운동 이후 공동체를 이루게 됐고, ‘모든 걸 함께 한다’는 기조 아래 다양한 공간에서 각자 일을 하며 지내고 있다”며 “무지개는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희망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무지개 공장 건물(위)과 쇼콜라덴 공장(아래)의 여성 가구공방 모습. 채혜원/쇼콜라덴 공장 제공
무지개 공장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거주시설을 갖춘 베를린의 최대 여성센터 ‘쇼콜라덴 공장’(Schokoladenfabrik)에 도착한다. 이곳 역시 다른 여성과 공동체를 이뤄 살고 싶어 하는 1인가구 여성, 한부모 여성, 레즈비언 등이 모여 폐허가 된 공장을 점거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2016년 겨울 쇼콜라덴 센터를 방문했을 때 공간의 다양성에 놀라 건물을 한참 돌아봤던 기억이 있다. 센터에는 여성이 직접 가구를 만들고 파는 공방과 카페, 동네 여성과 소녀를 위한 상담 및 교육센터, 터키식 여성 전용 사우나와 스포츠클럽까지 있었다. 센터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통해 건물 위층으로는 22가구로 이뤄진 여성주택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공간 구성은 건물점거 이후 여성지역센터 및 여성주택 건립을 위한 비영리협회와 협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가능했다. 지금은 104명의 여성 조합원이 변함없이 센터 곳곳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주자를 비롯한 여성 주민은 언제든 편히 방문해 학습하고 쉴 수 있는 여성 공간을 갖게 됐다. ‘헥센하우스’를 비롯해 건물점거로 만들어진 베를린 페미니즘 공간은 내가 일하는 이주·난민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의 역사와 교차한다. 2012년 난민운동가들이 비어 있던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학교를 점거했을 때 처음으로 ‘여성 공간’이 조직됐다. 그곳에서 초기 멤버들은 2014년 강제퇴거당할 때까지 난민여성을 위한 독일어 수업, 변호사 상담, 페미니즘 학습 등을 진행했다. 퇴거 이후 ‘국제여성공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공간이 필요했을 때 쇼콜라덴 공장과 무지개 공장 등 페미니즘 조직은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 도움으로 난민여성 증언집 출간, 국제 심포지엄 개최 등 주요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으며 마침내 2018년 말 모든 역사가 시작된 헥센하우스에서 불과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사무실을 갖게 되었다. 데니지 국제여성공간 창립멤버는 “건물점거 운동은 베를린에서 페미니스트 활동가에게 물리적 공간과 활동 기반을 마련하는 기회를 제공했다”며 “그때부터 여성 활동가들은 정부나 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공간을 지어 그 안에서 함께 살고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창출해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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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성도 혼자가 아니다!’
지난 3월8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집회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들이 함께 모여 연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코로나 시대를 맞아 새로운 여성운동 판을 짜고 있다. 채혜원 제공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해 최근 베를린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새로운 여성운동 판을 짜고 있다. 오프라인상으로 안전수칙과 거리두기를 지키면서 집회를 열고, 다양한 온라인 채널을 통해 진행할 수 있는 행사 조직에 여념이 없다. 국제여성공간도 코로나와 관련된 모든 정보로부터 차단된 채 위험에 빠져 있는 난민시설 실태와 이주자에게 일상이 되어버린 인종차별 사례 등을 다루는 팟캐스트 방송을 기획해 첫 방송을 앞두고 있다. 베를린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은 늘 ‘어떤 여성도 혼자가 아니다!’(No woman is alone!)라고 말한다. 따뜻한 동지애를 담은 연대의 메시지다. 그들의 뜨거운 자매애로 이주여성으로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었고, 안도할 수 있는 공간에서 1년 동안 베를린 페미니즘 역사의 일부를 ‘베를린 다이어리’로 연재할 수 있었다. 여성 공간에서 여성을 위해, 여성에 의해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곳이 베를린이든, 세계 어디든.
<끝> ※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채혜원: 한국에서 여성매체 기자와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chaelee.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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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7, 2020 at 03:51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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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집'에서 '무지개 공장' 지어 '여성공간' 만들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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