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천년을 이어온 불교의 토대가 붕괴되고 1424년(세종6) 선교양종으로 통폐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불교계 전체가 침체의 길을 걷게 된다. 고려 때 크게 유행하던 밀교 또한 태종 17년(1417) 『진언밀주경』, 『다라니집』과 같은 밀교계통 서적들이 불살라지면서 큰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16~17세기 들어 극심한 사회경제적 혼란과 자연재해,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왕실이나 민간에서 수륙재를 지내는 등 밀교의식이 성행하였고, 이를 위한 진언집과 불교의식집이 집중적으로 간행되고 일반에 배포되면서 밀교 신앙이 대중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남희숙, 16~18세기 佛敎儀式集의 간행과 佛敎大衆化, 2004.).
治病위한 대표적 佛書 『불정심다라니경』, 『약사경』
이처럼 조선시대 밀교는 억불정책 속에서도 오히려 민중 신앙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다라니, 진언류 등 밀교경전은 조선 중후기에 간행된 불서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러한 특징은 현세구복을 추구하는 『불정심다라니경』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 널리 유행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숭불과 배불 양면 정책이 교차되었던 조선 초기 기록에는 왕실과 지방관료의 주관으로 이 책을 간행하거나 사경했던 사례들이 남아있다. 세종 28년 광평대군이 창진(瘡疹)으로, 다음 해에는 평원대군이 두창(豆瘡)으로 사망하고 세자의 건강마저 악화되자 세종은 재위 32년(1450) 용문산 상원사에서 구병수륙재(救病水陸齋)를 여는 한편 『불정심타난리(佛頂心陁難哩)』를 간행하면서 승려들을 모아 사경하고 독송하게 하였다.
세종은 한 해 전에도 세자, 즉 문종의 치병을 위해 대자암에서 약사재(藥師齋)와 수륙재를 개설한 일이 있었다. 이는 조선 초기 『불정심다라니경』이 『약사경』과 더불어 치병을 위한 대표적인 불서로서 영향력이 컸음을 뜻한다. 이 같은 경향은 조선 말기까지 죽 이어져 1882년(고종6) 승려 추담정행(秋淡井幸)이 불가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려는 목적으로 각종 사찰의식과 규범, 주문, 염송, 부적 등을 모아 간행한 『일용집(日用集)』에도 이 책에 보이는 비자인(秘字印)이 구산부(救産符)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 중후기에는 진언과 다라니의 효험이 더욱 신봉되어 다수의 불교의식집에 수록되었고 민간의 치병을 위한 불교의례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 불경에 나타난 치병법에 대해서 한의학적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치병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다라니 경문을 지극한 마음으로 암송하거나 필사하는 방법이며, 둘째는 이 경전에 수록된 다라니와 비자인을 상품의 주사(朱砂)로 필사하여 향수, 모향수(茅香水), 청목향(靑木香), 수유(茱萸) 등을 달인 물에 섞어 복용하는 것이다.
한편 이 의경에서 적용대상으로 삼고 있는 질병군은 난산, 전염병, 난치병, 심통(心痛), 악몽 등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교의학적 부주법(符呪法)을 경전이 활용된 당시 주류의학이었던 한의학의 치료법과 어떠한 연관성을 갖고 있었을까?
먼저 『향약집성방』에서는 산난문(産難門), 소아과문(小兒科門), 제구급문(諸救急門)에서 부주법을 활용하고 있다. 산난문에서는 난산 치료와 동시에 ‘정신이 온전해야만 해산할 때 편안함’을 중시하였다. 이에 따라 최생(催生)을 위한 수십 종의 약 처방 외에도 상당수 부주법이 등장한다.
불교의학적 부주법(符呪法), 심리적 안정 치료 기대
『왕악산서(王嶽産書)』를 인용하여 3종의 부적을 모향탕(茅香湯)으로 복용한 사례, 8종의 난산부(難産符)를 종이에 써서 복용하거나, 산모방의 벽에 붙이거나, 출산하는 요 밑에 넣어두는 등 활용방법도 다양하다. 이러한 부주법에서 실제 치료효과를 기대하기보다는 산모가 심리적 안정을 취하고 주위 환경을 정돈하고 경건히 하는 민간신앙 차원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소아과문에서는 소아객오(小兒客忤)와 소아야제(小兒夜啼)에 부주법을 썼다. 소아객오란 어린아이가 갑작스레 발작하는 증상으로, 아이가 이상한 물건을 보았거나 귀신, 악기(惡氣)에 감촉되었기 때문인데, 그 치료법으로 16종의 약방과 함께 1종의 부주법이 수록되었다. 또한 소아야제란 아이가 밤에 심하게 보채고 우는 증상인데, 금기를 범하여 발병한 경우에는 법술(法術)로 치료해야 한다고 기술하였다.
구급문에서는 ‘卒魘(졸염)’, 즉 꿈속에서 귀신의 사기에 눌려서 생긴 가위눌린 데 부주법을 처방하였다. 개괄해보면 『향약집성방』에서 부주법이 활용된 경우는 난산, 소아객오, 소아야제, 졸염에 한정되며, 환자의 심리적 안정이 치료의 관건이 되거나, 귀신 탓으로 여겨지던 질병, 사회적 금기를 범한 까닭에 병이 생긴 경우에 활용하였다.
다음으로 『동의보감』에서는 부인문과 사수문(邪祟門)에서 발견되는데, 부인문에서는 난산에 대하여 최생여성산(催生如聖散), 달생산(達生散), 자소음(紫蘇飮) 등 십수 종 약방과 더불어 산모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부주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임산부가 거처하는 방 안에 주묵(朱墨)으로 ‘안산방위도(安産方位圖)’와 ‘최생부(催生符)’를 써서 붙인 뒤, ‘산모가 편안히 거처하고 장애가 없게 하며, 여러 신들이 보호하여 온갖 악귀를 물리쳐’ 달라는 주문을 외우게 하였다.
또한 주사로 그린 부적 종이를 태워서 따듯한 물에 섞어 마시게 하였다. 또 사수문에서는 당시 세속에서 ‘귀신들린 병’이라고 믿었던 정신질환의 치료에 벽사단(辟邪丹)ㆍ소합향원(蘇合香元) 등 약처방과 더불어 『만병회춘』의 부주법 처방을 짧게 인용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의서에서 부주법을 적용한 사례와 『불정심다라니경』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유사한 점이 확인된다. 즉, 모두 당시 의학으로 치료가 어렵거나 강력한 심리요법을 동원해야 하는 경우, 또는 종교문화적인 믿음에 근거하여 귀신의 소행으로 여기던 특수한 경우에 한정하여 부주법을 동원했다. 이러한 사실은 민간요법에서 두통이나 위통, 한기와 같은 상습증상이나 소변불통, 악창 등 온갖 질병에 대해 병부적이 존재했고 마치 만병통치처럼 사용해 온 것과 구별되는 점이다.
한편 다라니와 비자인을 필사하여 복용하는 과정에서 가장 널리 쓰인 약재는 수비(水飛)를 거쳐 법제(法製)한 주사(朱砂)이다. 알다시피 주사의 효능은 ‘정신을 기르고 혼백을 안정시키며, 눈을 밝게 하며, 얼굴에 윤기가 돌게 하고 혈맥을 통하게 하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악귀를 몰아내는’ 것이다. 『동의보감』에서 주사가 단방으로 등장하는 병증문은 신문(神門)을 비롯해 심장, 면(面), 온역(瘟疫), 사수(邪祟), 옹저, 부인 등이다. 바꿔말해 『동의보감』에서 주사의 효능은 심신 안정에 집중되어 있다 할 수 있으며, 귀신의 소행으로 여기던 사수나 온역 치료에도 사용하였다.
『불정심다라니경』, 안도감과 신앙심의 귀의처 마련
어찌 보면 『불정심다라니경』이나 한의서에 등장한 부주법은 또 다른 일면에서 주사와 같은 진심안신의 효능을 가진 광물성약재를 극소량 효율적으로 처방하고 여기에 덧붙여 신앙심을 부추겨 심리적 안정을 꾀하기 위한 방편으로 간주할 수 있겠다 싶다.
결론적으로 『불정심다라니경』에 나타난 치료법은 부주법과 종교적 신앙심에 근거하고 있지만, 환자의 심리적 안정이 치료 여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출산 및 정신질환처럼 특수한 경우에 한정하여 활용했다는 점과 당대 시대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일정 부분 합리성을 보인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의약으로 치료되지 않았던 원인불명의 증상이나 전염병, 난치병의 경우에 이용하도록 권고되었고, 실제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적용사례에 있어서도 난치성 질병군에 국한해 이차적, 보조적 수단으로서 사용되었다. 우리는 이 한권의 오래 된 불의경 속에서 열악한 의료 환경에서 소외되었던 수많은 민중들에게 심리적 안도감을 주고 신앙심의 귀의처를 마련해 주었던 한국 불교의학의 일면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글은 한국의사학회지에 발표된 ‘『佛頂心陀羅尼經』의 치병법을 통해 살펴본 한국 불교의학의 일면’(2019)의 요지를 개편한 것임.
June 19, 2020 at 06:51AM
https://ift.tt/2YPKmLX
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24 > 뉴스 - 한의신문
https://ift.tt/3hnW8pl
Bagikan Berita Ini
0 Response to "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24 > 뉴스 - 한의신문"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