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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콜롬비아 살렌토에서 에스프레소 한잔을! - 한겨레

[노동효 지구둘레길] 콜롬비아 살렌토 여행
세계문화유산 지정된 ‘커피 존’ 살렌토
커피생산자협회 통해 커피 품질 관리
커피 부드럽고 지역 따라 맛·향 달라
콜롬비아 살렌토의 레알 거리. 노동효 제공
콜롬비아 살렌토의 레알 거리. 노동효 제공
에콰도르에서 칼 든 강도들에게 신용카드, 수중의 돈, 카메라 등등을 다 털린 후 히피 숙소에서 우연히 만난 떠돌이 서커스단과 어울려 콜롬비아를 여행하던 무렵이었다. 처음엔 마리, 존, 나노를 포함한 6명이었지만 각자 갈 길을 찾아 헤어지면서 칠레 출신 케뇨, 아르헨티나 출신 파블로, 나 그렇게 셋이 남았다. 우리는 콜롬비아 중부의 대도시 아르메니아에서 커피마을 살렌토행 버스로 갈아탔다. 콜롬비아가 최상급 커피를 뜻하는 ‘수프리모’란 스페인어 형용사를 널리 알린 나라이자 남미의 별다방 ‘후안 발데스’의 본고장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커피 때문에 살렌토를 찾아간 건 아니었다. 살렌토 근교 농장에서 열리는 서커스 학교에 참가하기 위해 찾아갔던 터라 살렌토가 세계문화유산으로 꼽히는 ‘커피 존’이자 ‘커피 트라이앵글’에 속하는 건 도착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살렌토의 볼리바르 광장. 노동효 제공
살렌토의 볼리바르 광장. 노동효 제공
지리산 둘레길을 오가는 듯
안데스 산악지대 해발 1900m에 이르러 버스가 섰다. 우리는 볼리바르 광장에서 커피 한잔씩 마시고 마을을 벗어났다. 비포장 오솔길을 내려가는 동안 경사진 비탈엔 불그스름한 열매가 나무마다 매달려 있었다. “커피 열매구나!” 케뇨가 말했다. “어쩐지 커피가 아주 신선하고 맛있더라!” 파블로가 말했다. 나 역시 근래 마신 커피 중 가장 맛있는 커피였다고 여기던 참이었다. 서커스 학교에서 나흘간 머물며 새로운 기예를 배우고 익힌 후 우리는 도시로 돌아갔다. 히치하이크로 얻어 탄 농장 트럭은 살렌토를 거치지 않은 채 구불구불 비포장도로를 지나 아르메니아 시장 앞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그 후 문득문득 살렌토에서 마셨던 커피가 떠오르곤 했다. 부드럽고 달콤하면서 쌉쌀한 맛의 조화가 불러일으키던 감흥이 못내 그리웠다.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이번엔 동행인이 바뀌었다. 들어본 적 없는 살렌토가 어떤 마을이냐고 묻는 아내에게 답했다. “콜롬비아 안데스산 기슭에 자리한 마을인데, 급히 자릴 뜨느라 자세히 들여다보진 못했지만 아주 예뻤어. 알록달록한 집들이며, 키 큰 야자수가 서 있는 광장, 골목마다 여행자 숙소와 카페들. 볼리비아의 여행자 마을인 사마이파타, 에콰도르의 빌카밤바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무엇보다 커피가 맛있는 곳이었어!” 남미에서 2년 동안 홀로 여행했고, 반년은 아내와 여행했다. 동남아시아든 남아메리카 대륙이든 먼저 둘러본 후 다시 만나고 싶은 친구가 사는 곳이나 다시 가고픈 장소로 아내를 데려갔다. 살렌토가 그런 곳이었다. 읍내 인구 3천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라 찾아가려면 수차례 환승을 해야 하지만 한번 갔던 길이라 익숙했다. 일단 아르메니아로 가서 살렌토행 완행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막차를 탄 터라 해 저문 후 살렌토의 중심 볼리바르 광장에 닿았다.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지만 걱정은 없었다. 흔히 남미를 강도와 좀도둑이 들끓는 곳으로 여기지만 실상 대도시를 벗어나면 지리산 둘레길의 마을을 오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순박하고 선량한 사람들, 정겹고 포근한 미소. 읍내 크기라고 해 봐야 광장을 중심으로 1㎞ 이내, 배낭을 짊어지고 마음에 드는 숙소를 찾아 이곳저곳을 오가던 중 아내가 말했다. “마을이 정말 예뻐!” “가게들이 문을 연 시간엔 더 예쁠 거야!” 광장에서 100m가량 떨어진 숙소를 잡았다.
꽃과 함께 나오는 에스프레소. 노동효 제공
꽃과 함께 나오는 에스프레소. 노동효 제공
아랍식 커피포트(왼쪽)와 프랑스식 커피추출기(오른쪽). 노동효 제공
아랍식 커피포트(왼쪽)와 프랑스식 커피추출기(오른쪽). 노동효 제공
잠들지 않는 수도원
다음날 아침 나는 케뇨, 파블로와 커피를 마셨던 카페로 아내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외쳤다. “헤수스 마르틴!” 헤수스 마르틴은 가게 이름이자 이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가리키는 별칭이다. 주문하고 밖을 보는데 맞은편 이층집 창밖으로 할머니가 고개를 내밀더니 넝쿨식물에 물을 줬다. 곧 바리스타가 커피가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에스프레소, 물, 유리잔에 담은 꽃. 매일 싱싱한 꽃을 곁들여 커피를 내놓는 게 카페 ‘헤수스 마르틴’에서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하는 방식이다. 이러니 커피가 어떻게 맛있지 않겠는가. 서커스 학교가 열리는 농장으로 가는 길을 묻느라 예전엔 미처 보지 못했던 소품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아랍식 커피포트, 프랑스식 커피 추출기, 커피 열매와 커피 생두를 담은 유리병들, 실내 벽에 붙은 그림들과 낯선 지도. 아침이라 카페는 한가했다. “저 지도는 뭐니?” 바리스타가 지도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라비카 커피가 각국으로 전파된 시기와 경로를 그린 거야.” 화살표의 시작은 6세기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아라비아반도의 예멘이었다. “언제부터 인류가 커피 열매를 먹었을까?” 내가 유리병 속의 커피 열매를 가리키자 바리스타가 웃으며 대답했다. “옛날 옛적엔 닥치는 대로 먹고, 먹고 보니 별 탈 없으면 기억해뒀다가 또 배를 채웠을 테니 처음 커피나무 열매를 먹은 건 수십만년 전이겠지. 아마 처음 커피 열매를 맛본 인간은 ‘퉤퉤’ 하고 뱉었을 거야. 그리 달콤하지도 않고 씨로 가득 차 먹을 것도 별로 없으니까. 훗날 60명당 1명이 커피 관련 산업에 종사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을걸. 전세계 커피 관련 산업 종사자가 1억2500만명이 넘어.” 바리스타의 말을 듣고 또 물었다. “놀랍구나. 커피를 처음 마신 건 언제부턴지 아니?” “6세기 무렵일 텐데, 칼디라는 목동이 붉은 열매를 먹은 염소가 날뛰는 광경을 목격한 후 그 열매가 달린 가지를 들고 수도원장에게 달려갔어. 수도원장은 난롯불에 던졌다가 커피콩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를 맡기라도 했는지 그걸로 차를 우려먹었지. 그랬더니 정신이 번쩍! ‘카페인’ 성분에 의한 각성 효과가 나타났고 머잖아 그 수도원은 ‘잠들지 않는 수도원’이 되었대! 하하하.” 바리스타와 커피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커피나무 원산지는 에티오피아고, 생콩을 불로 로스팅하고 물로 추출해서 지금과 비슷한 커피를 즐기고 커피나무를 처음 재배한 이들은 아랍인이야. 아랍인은 원두를 잘게 부숴 냄비에 붓고 물과 함께 끓여 마셨어. 그 후 아랍에선 수학, 천문학, 의학, 물리학, 화학, 철학 등 이성의 능력이 폭발했지. 9세기부터 13세기는 아랍 과학의 전성시대야.” “유럽인도 커피를 마시잖아?” “그건 17세기 이후지. 아랍어 통역관이자 첩자이던 사내가 전리품 중 포대 속의 커피 생두를 알아보고 유럽으로 가져가 카페를 열었어. 아랍식에서 원두 가루를 걸러낸 맑은 커피를 팔았고, 유럽인도 커피에 빠져들었지. 커피의 각성 효과 덕분에 유럽인의 뇌도 환해져서 이성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전하고, 마침내 커피가 프랑스 혁명까지 일으켰어.” “뭐라고?” “계몽철학자들은 커피 애호가였거든. 볼테르는 하루에 50잔 이상 커피를 마셨고 루소도 커피를 사랑했지.” “흠, 남미엔 어떻게 전해졌는데?” “유럽인까지 커피를 마셔대면서 생두 값이 오르자 유럽 각국은 식민지에 커피 농장을 만들기 시작했어.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프랑스는 베트남에,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콜롬비아에 커피가 들어온 과정은 조금 다르긴 해. 씨앗에서 커피 열매가 맺히는 나무가 되기까진 5년이 걸려. 농부들은 커피를 재배하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예수회 신부가 고해성사하는 이들에게 죄 사함을 위한 고행 대신 커피 묘목을 심고 가꾸도록 권했지. 그렇게 해서 콜롬비아 곳곳에 커피나무가 자라게 된 거야!” “콜롬비아 커피는 정말 맛있어!” “커피나무는 아열대 고지대에서 잘 자라. 안데스 기슭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적고, 연평균 기온도 적당해서 커피나무가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이지. 콜롬비아에서는 농장주들이 일찍부터 커피생산자협회(FNC)를 만들어 커피의 품질과 커피에 관한 모든 정책을 관리해. 손으로 커피 열매를 따고, 생두 판매가의 90%가 생산자에게 돌아가도록 하지. 생산자협회 덕분에 콜롬비아 커피의 상징 ‘후안 발데스’ 캐릭터가 세계로 알려졌고, 세계인의 머리엔 ‘100% 콜롬비아산 커피’라는 문구가 각인되었어. 콜롬비아 커피는 부드럽고 지역에 따라 맛과 향이 다채롭지! 우리 카페에선 이 동네에서 생산된 커피콩으로 커피를 내려.”
살렌토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인 코코라 계곡. 노동효 제공
살렌토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인 코코라 계곡. 노동효 제공
살렌토의 밤 거리 풍경. 노동효 제공
살렌토의 밤 거리 풍경. 노동효 제공
“라일락 향기를 말로 표현할 수 있나”
살렌토에서 머무는 동안 낮엔 코코라 계곡을 다녀오거나 마을 전경이 내려다뵈는 전망대를 오르고, 해 질 무렵이면 광장 옆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다가 아침이면 늘 ‘헤수스 마르틴’에서 커피를 마셨다. 박식한 바리스타의 등 뒤엔 커피 향과 맛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동그란 바퀴 형태로 새겨져 있었다. 아몬드, 초콜릿, 꿀, 재스민, 장미, 딸기, 복숭아, 파인애플, 위스키, 담배 등 그 단어들을 순서대로 읽다가 문득 이슬라마바드에서 원조 히피 할아버지를 만나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1969년의 우드스톡’이 어떠했는지 물었을 때 노인은 내게 되물었다. “자네, 라일락 향기를 말로 표현할 수 있겠나? 사과 맛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겠나? 우드스톡은 그런 곳이었어.” 살렌토의 카페에 앉아 마시던 에스프레소의 향과 맛에 관해 묻는다면 나 역시 같은 답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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