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류영재 대구지방법원 판사 판사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고 호소하는 직원의 글이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라왔다. 글에는 자신이 당했다는 ‘갑질’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빼곡히 적힌 그 글자들을 보면서 슬픔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이는 살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다는데 앞으로 겪을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직장 내 괴롭힘.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 이 개념은 누구나 다 알 것 같으면서도 막상 따져보면 애매모호하다. 우위를 이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업무상 적정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원래 먹고살기 위한 노동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스러운 것 아닌가? 이처럼 직장 내 괴롭힘은 폭넓은 해석이 필요한 고맥락적 개념이다. 갑을관계에서 맥락을 파악해야 하는 이는 통상적으로 을이므로, 하급자들은 딱 보면 아 하고 알 수 있으나 상급자들은 백날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편면적 개념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매일매일 반주를 겸한 저녁을 같이 먹어야 하는 근무환경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직원 앞에서 사비를 들여 비싸고 맛있는 저녁을 사주는 게 왜 직장 내 괴롭힘이냐고 되묻는 상사의 모습이 전형적인 예다. 이러한 고맥락적, 편면적 특성으로 인해 ‘직장 내 괴롭힘이 존재한다’는 평가가 이견 없이 내려지기는 쉽지 않다. 사실관계를 확정하기까지의 과정도 중요하다. 재판을 하면 양 당사자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들을 정리하여 정연히 제출한다. 판사는 주장과 증거들을 맞춰보고 대조하며 사실관계를 사후적으로 확정해나간다. 증거들이 형성되기까지의 지난한 사정들은 생략되거나 간과되기 쉽다. 마련된 증거들을 검토하여 사후적으로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과 사실 인정을 위한 증거들을 수집하는 과정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간극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판사는 재판에 현출되지 아니한 간극을 함부로 추측하거나 고려할 수 없다. 가끔 재판이 현실에 비해 지나치게 납작해진다면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증거 수집 단계를 지난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봐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고 조직 문화가 폐쇄적이며 위계적이면 이를 주장하고 증거들을 수집하는 과정 자체가 피해자에게 지옥일 수 있다. 물증이 없는 직장 내 괴롭힘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피해사실 진술, 동료들의 증언, 각종 정황증거들이 필요하다. 증거 수집을 방해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를 흔들어 진술의 신빙성을 낮추고 동료들이 그를 위해 나서지 못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가해자는 종종 조직 내의 입지를 이용해 피해자에 대한 마타도어를 펼친다. 흔한 마타도어로는 업무능력 부족, 인사 불만, 꽃뱀설 등이 있다. 마타도어로 인해 피해자는 직장 내에서 고립되고 정신적 상해를 입기도 한다. 직장 내 괴롭힘이 인정된 뒤에도 정신적 상해를 적절히 치유받지 못해 업무능력이 저하되거나 직장 내 고립이 회복되지 않아 결국 피해자가 그 직장을 떠나게 되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이런 어려움들을 고려해서 고용노동부는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을 발간했다. 매뉴얼을 찬찬히 읽다 보면 지향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용자를 비롯한 조직의 전 구성원이 참여하고 상호작용하는 자율적 해결 절차를 통해 직장 내 괴롭힘을 근절하고 피해자의 온전한 일상회복을 도모하는 건강한 조직. 직장 내 괴롭힘의 신고가 있을 경우 형사 절차로 직행하지 않고 유형별·강도별로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다양한 해결이 가능하도록,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보호받을 수 있도록 모색했다. 신고 내용이 결과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신고한 노동자의 정신적·신체적 고충 자체를 인지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당부는 매우 인상 깊었다.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론 공허했다. 이 섬세하고 꼼꼼한 매뉴얼이 구현되는 직장을 상상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내 마음은 다시 법원으로 향한다. 그 글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직장 내 괴롭힘에는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결론이 나오든 간에, 그 과정에서 글쓴이의 입장과 고충이 십분 이해되길 바란다. 과정이 끝날 때까지 그가 고립되거나 상처받지 않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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