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들은 이후 울릉도를 거점으로 활발히 어업 활동을 했다. 1905년에 끝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울릉도에서 오징어를 잡는 일본인이 급증했다. 그들은 울릉도 곳곳에 종교시설인 신사(神社)를 지었다.
그런데 울릉도의 신사는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고, 한국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시설로 사용됐다. 울릉도 주민이 굳이 신사를 찾아가 바다의 신에게 풍어(豊漁)를 기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문혜진 동서대 일본연구센터 연구원은 국립민속박물관이 펴내는 학술지 '민속학연구' 최신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지배문화와 토속문화 간 포섭과 변용'이라는 관점으로 이 문제를 분석했다.
문 연구원은 우선 울릉도에 온 조선인과 일본인의 생계 수단이 달랐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조선인들은 굶주림에 시달려도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았고, 자급자족을 위한 어업 활동을 했다"며 "일본인들은 어업조합을 통해 집단 거주촌을 확장했다"고 설명했다.
주로 농업에 종사한 조선인들이 오징어 어업에 뛰어든 시기는 1907년 무렵이다. 다만 조선인 중에서도 상류층은 어업 활동을 하지 않았고, 경제적 여력이 없는 사람이 일본인 아래에서 일했다고 문 연구원은 주장했다.



문 연구원은 "일본인은 도동·저동·사동·태하 지역에 신사를 건립하고 조합원을 중심으로 해신제를 했다"며 "조선인은 대부분 조합원이 아니었고, 마을마다 산신당을 건립해 산신제를 거행했을 뿐 별도로 해신당을 만들어 해신제를 지내지 않았다"고 했다.
즉 농업에 기반을 둔 조선인은 울릉도에 와서도 육지에서처럼 산신당에서 건강과 안녕을 빌었고, 주로 고기잡이를 한 일본인은 신사에서 해신제를 올렸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일본인이 철수하면서 신사는 의미 없는 공간이 됐으나, 어장을 차지한 울릉도 주민들은 일본인처럼 신사에서 해신제를 하는 새로운 풍습을 만들어냈다고 문 연구원은 주장했다.
문 연구원은 "조선인 어부들은 급히 해신당을 지을 힘이 없어 신사를 수용해 해신제를 진행했다"며 "신사에 모신 바다의 신은 일본 신인 '곤피라'에서 동해의 용왕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반일 감정으로 신사를 철거한 마을에서는 바다 앞 바위를 신체(神體)로 삼아 해신제를 올렸다"고 덧붙였다.
문 연구원은 "한국인이 일본 신사에서 해신제를 지내거나 어업이 주요 생업이 되어 해신제를 새롭게 지내게 된 사례는 비단 울릉도만이 아니라 감포, 구룡포, 통영 등지에서도 나타난다"며 "일제 식민지 문화변동은 탄압과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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