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센 존재와 그 옆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약한 존재의 이야기를 주로 다뤄온 유준재 작가. 그의 옆에 2015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선정작인 <파란파도>의 주인공 파란 말이 보인다. 사진 해란 작가
막내로 태어나 막내로 컸다. 무뚝뚝하고 엄한 건축설계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삼남매 중 막내, 섬유미술 전공생 시절 작업실 막내. 크고, 세고, 앞선 사람들이 “너는 이렇게 해”라고 주도할 때면 강함에 대한 동경, 발언권을 갖지 못한 약자로서의 불만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뒤엉켰다. “어디를 향해 달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면 말을 그렸다. 들판을 펄쩍 뛰어오르는 말처럼 벽을 훌쩍 넘어 다른 나로 탄생하고 싶다는 열망의 표출이었다. 2015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선정작인 <파란파도>는 오직 승리를 위해 길러진 파란 말이 주인공이다. 전쟁 기계처럼 냉철하게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던 파란 말이 어느 날 “어른의 반밖에 안 되는 덩치로 차갑게 눈을 빛내는” 어린 병사 앞에서 평소와 달리 멈칫한다. 이 멈칫거림을 계기로 파란 말은 자기반성적 존재로 바뀌어간다. 최근작 <시저의 규칙>(2020)은 숲을 지배하는 포식자 악어 ‘시저’의 이야기다. 소리를 내는 동물은 무조건 질겅질겅 씹어 먹는다는 자신만의 규칙을 지켜온 악어가 어미를 잃은 새끼 새들로 인해 처음으로 망설임을 배운다. 데뷔작 <마이볼>(2011)은 가부장 아버지 곁에서 야구를 통해 간신히, 그러나 가슴 뻐근하게 소통했던 소년 시절을 회고한 유준재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그는 왜 힘센 존재와 그 옆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약한 존재의 이야기에 이토록 매료된 걸까. 한순간의 멈칫거림과 망설임이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걸까. 교내 커플이었던 아내와 함께 열세살 딸을 양육하는 생활인으로서의 흔적, 소통에 골몰하는 작가로서의 흔적이 정겹게 뒤엉킨 의정부 자택에서 대화를 나눴다.
유준재 작가의 이름을 널리 알린 <파란파도>의 주인공. 공예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책 작업에 앞서 이렇게 주인공을 목각 인형으로 깎아보면서 느낌을 찾을 때가 많다. 사진 해란 작가
―최근작 <시저의 규칙>은 따님 덕분에 나온 책이라고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물려주신 의자를 저희 집 식탁에 놓고, ‘가장의 의자’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저만 그 의자에 앉을 수 있다는 규칙을 멋대로 정하고요. 그런데 어느 날, 11살 난 딸아이가 정신없이 뛰어와서 의자에 덥석 앉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화가 끓어올라서 “가장의 의자에는 아빠만 앉을 수 있어! 당장 내려와!”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놀란 딸아이가 눈물을 보이면서 “그건 누가 정한 규칙인데… 정말 이상한 규칙이야”라고 말했어요. 평소에 친근한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믿었는데, 혼자만 좋은 규칙을 만들고 강압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짓을 제가 하더라고요. 그날 반성을 많이 했고, 깨달았어요. 규칙은 권력이 만든다는 사실과 규칙 자체가 임의적일 때가 많다는 사실을요. 예를 들어 낚시할 때 치어는 놓아준다는 규칙이 있잖아요. 그런데 알이 꽉 찬 도루묵은 별미로 즐기지요. 알은 먹어도 되고, 치어는 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도 포식자인 인간이 만든 임의적 규칙이에요. 제 안의 꼰대 근성을 반성하면서 우리 주변의 규칙을 한번쯤 의심해보자는 생각에서 <시저의 규칙>을 짓게 되었어요.”
―강자가 자기 모습을 자각하고 멈칫하는 순간은 <파란파도>에서도 발견돼요. “사실 현실의 기득권은 좀처럼 자기반성을 하지 않죠. 무소불위의 강자도 멈칫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자꾸 그런 이야기를 짓는 것 같아요. 그런 반성적 사고나 망설임이 없으면 변화가 일어날 틈이 없어요. 누구든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어딘지 찜찜하고 불편해져서 자신을 반추하는 상태에 빠져 볼 필요가 있어요. 변화의 변곡점은 그런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변화가 두려운 사람은 멈칫하지 않겠죠.”
2016년에 발표한 <균형>은 원뿔형 고깔을 쓰고 무대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 아이가 주인공이다. 태어나 걸음마 연습을 하는 순간부터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균형이라는 인생의 숙제는 늘 우리와 함께한다는 통찰을 담은 작품. 사진 해란 작가
―흥미로운 건 변곡점을 만드는 존재가 ‘어린 병사’, ‘새끼 새’로 대표되는 약자라는 점이에요. “<파란파도>에서 승리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어린 병사를 보면서 주인공 파란파도는 전쟁 기계로 길러진 자신의 과거를 깨달아요. ‘아, 내가 저런 모습이었구나’라고 스스로를 본 거예요. <시저의 규칙>에서 원래 시저 눈 밑에 초승달 모양의 흉터가 없었어요. 처음에는 흠결 없이 강한 악어를 그렸는데,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누구든 거침없이 잡아먹는 최고 권력자가 자기가 만든 규칙을 깨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 이유가 없는 거예요. 고민 끝에 시저 눈 밑에 상처 자국을 그렸는데, 그때부터 이야기가 술술 풀렸어요. 시저도 한때 약자였고, 그보다 더 강한 존재에게 공격받은 경험이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드러냈어요. 그런 기억 때문에 새끼 새들을 보고 멈칫하고, 자신을 포개어 본 거예요.”
―상처가 없을 때는 이야기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네요. “대학 시절부터 칼로 작업을 해와서 붓보다 칼이 편할 때가 있어요. 칼은 이중성을 가진 도구예요. 상처를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상처를 도려내어 새롭게 태어나게 돕기도 해요. 제 대학 시절 작업 대부분이 상처를 주제로 한 것이었어요. 다양한 섬유를 가르고 포개고 염색하고 꿰매는 작업을 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자연스레 끌리는 화두가 상처를 통한 자기 재발견인 것 같아요. 독자들이 상처의 어두운 면에 너무 절망하지 말고,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소망해요.”
―첫 책 <마이볼>에서 무뚝뚝한 아버지는 야구를 가르쳐줄 때만 말수가 많아져요. “공은 책임지고 잡는 거야. 겁먹지 말고 공을 끝까지 봐” 같은 조언은 야구에 대한 조언이자 살아가는 태도에 대한 조언처럼 들립니다. “저에게 중요하게 각인된 기억이 있어요. 어느 제삿날 오후에 아버지, 형과 셋이서 야구를 하다 형이 휘두른 배트에 맞아서 크게 다친 일이 있었어요. 응급실에서 여러 바늘을 꿰맬 정도로 입가가 찢어졌는데, 평소엔 무척 엄한 아버지가 “괜찮다”고 하면서 밝게 웃으시더라고요. 보통 아이가 다치면 놀이를 그만두는데, 저희는 병원에 다녀와서 남은 경기를 마무리했어요. ‘다칠 가능성이 있다고 야구를 안 하진 않는다, 경기를 하다 보면 다치기도 하니 툭툭 털고 최대한 가볍게 대처한다’는 태도를 보여주셨어요. 살다 보면 겪게 되는 굴곡을 어떤 자세로 마주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싶어서 그러셨던 것 같아요. 물론 대놓고 말씀하기 낯간지러워 야구에 빗대어 해주셨지만요.”
의정부 자택의 방 한 칸이 작가의 작업실이다. 한 면 가득 그림책이 꽂혀 있고, 데뷔작의 모티브가 된 글러브와 야구공이 놓여 있다. 사진 해란 작가
―5살 어린이에게 권력, 성장 등의 개념을 설명해야 한다면 저는 진땀 날 것 같은데요. 그림책 작가들은 한발 더 나아가 55살 독자가 읽어도 울림 있는 창작물로 만든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작가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른, 아이 모두 공감하도록 바꿔내는 작업은 정말 힘들어요. 일례로 <마이볼>은 글과 그림이 다른 견본 책을 10여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는데, 그림책 작가에게 이 정도 고민은 일상이에요. 쉽고 편하게 읽히는 그림책일수록 작가의 고통이 크다고 보면 돼요.”
―그럼에도 계속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제가 가장 많이 곱씹는 단어가 두려움이에요. 두려움이 없으면 창작이 안 되는 것 같거든요.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잘할 수 있을까? 망치면 어쩌지? 앞으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까?’ 긴장되고 무서워요. 두려우니까 계속 귀와 눈을 열고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찾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어? 혹시 이렇게 하면 될까?’ 싶은 작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두려움 속에서 설렘이 피어나요. 저는 두려움과 설렘이 같은 단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한 교수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영감은 끊임없이 소리치고 두드리는 사람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단다.’”
―2019년에 출간한 <정연우의 칼을 찾아주세요>는 연우의 잃어버린 장난감 칼이 매개가 되어 동네 친구들이 상실의 경험을 고백하는 책입니다. 선물받은 목도리, 돼지저금통, 고양이 점순이, 그리고 돌아가신 엄마까지 상실한 대상은 모두 다르지만,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감정을 공유하며 하나가 되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이 책은 글만 작업하셨더라고요. 왜 직접 그리지 않으셨나요? “책에서 엄마를 잃었다고 말하는 아이가 실은 제 조카예요. 당시 누나를 잃었어요. 헤어나기 무척 힘든 상처였지요. 병동에 누워 있던 누나가 “내가 떠나면 내 이야기로 그림책 한 권 만들어줘”라고 부탁했고, 저는 “에이, 그럴 일 없어. 누나는 완쾌할 거야” 대답했어요. 상실에 대해 곱씹던 어느 날 새벽에 아파트 정자에 붙은 전단지가 눈에 들어왔어요. 어린이 글씨체로 ‘정연우의 칼을 찾아주세요’라고 적혀 있었어요. 제게 각별한 ‘칼’이라는 단어가 있으니 가슴팍에 뭔가 꽂히는 기분을 느꼈어요. 깜깜한 새벽에 아파트 단지를 허겁지겁 돌았어요. 같은 내용의 전단지를 10장 넘게 발견했는데 손글씨체가 제각각이었어요. 만약 연우가 혼자 만들었다면 ‘제 칼을 찾아주세요’라고 썼을 테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여러 친구들이 연우를 위해 함께 전단지를 써줬구나! 번쩍 깨달았어요. 바로 우르르 글이 쏟아졌어요. 그림을 전혀 떠올리지 않고 글을 쓴 건 처음이었어요. 그림도 그려보려고 무지 노력했는데, 이 책만큼은 잘 안되었어요.”
감광기로 빛을 쬐어 만든 실크판 위에 염료를 올린 뒤 밀대를 밀면 아래에 있는 종이에 인쇄가 된다. 실크판 만들기부터 인쇄까지 모두 집에서 작업하고, 작업 후에는 곧장 실크판을 세척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방부터 욕실까지 아수라장이 될 때가 많다. 해란 작가
―“잃어버렸지만, 잊혀지지 않는 소중한 것들”이라는 표현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제가 삶을 지속하는 한 누나를 기억한다면 누나는 계속 우리와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잊지 않으면 잃지 않을 수 있다고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통은 분명 감당하기 어렵지만, 다른 방식으로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해요. 호스피스 병동에서 웃음이 피어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죠? 그런데 누나를 간호하며 봤어요. 거기에도 삶이 있더라고요. 희망은 아주 절망적인 곳에서 태어나는 새싹 같아요. 두려움의 극단에서 피어나는 설렘처럼요. 표현이 다소 진부해도 그게 진실 같아요. 얼마 전, <사기병>으로 알려진 사랑하는 후배 윤지회 작가가 천국으로 갔어요. 그림책 모임 단톡방에서 이런 대화가 오갔어요. 지회가 병치레로 많이 힘들었으니 웃으면서 보내주자고, 울 사람은 장례식장에 오지 말라는 작은 농담과 함께. 허무나 절망은 쉬워요. ‘웃자’고 말하는 건 어렵지요. 그런 힘을 갖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신발장 옆에 걸린 작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크기와 색감이 미묘하게 다른 조롱박 모양의 자투리 가죽을 이어 붙인 패치워크 작품이었다. 배경이 된 광목천은 난도질을 당한 듯 수십개의 바느질 선이 촘촘했다. 하단에 연필로 쓴 서명이 보였다. ‘2002, ZZUN’.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땐 내 살갗을 베인 듯 움찔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집에 돌아와 한참 들여다보았다. 수없이 갈리고, 누덕누덕 기워지고, 그 위에 다른 모양이 덧대어져 결국 유일무이한 생김을 갖게 된 그림. 상처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두려움에서 설렘을, 절망에서 희망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그 안에서 작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유준재 작품 목록 2011년 <마이볼> 문학동네
2013년 <엄마 꿈속에서> 문학동네
2014년 <파란파도> 문학동네
2016년 <균형> 문학동네
2019년 <정연우의 칼을 찾아주세요> 문학동네
2020년 <시저의 규칙> 그림책공작소 대표작
파란파도 작가 소개
섬유미술 전공 4학년인 2001년에 우연히 대타로 투입된 <티티엘>(ttl) 잡지 표지로 출판미술에 발을 들였다. 공예를 하던 습관 덕에 붓보다 칼이 익숙하다. 종이를 오려 도안을 만드는 실크스크린 작업을 즐겨 한다. 다양한 어린이책에 삽화를 그렸고, 2007년 <동물 농장>으로 노마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2015년에는 창작 그림책 <파란파도>로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선정되었다.
▶ 최혜진. 사람을 인터뷰하는 에디터이자 미술과 문답한 과정을 글로 쓰는 작가.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우리 각자의 미술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등을 썼다. 삶에 위로를 받고 싶을 때면 늘 그림책이 곁에 있던 것을 생각하며,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과 ‘세상을 돌파하는 힘’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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