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발견된 돼지저금통. 등 부분에 동전을 넣는 구멍이 있다. 진흙으로 만들어졌으며 14~16세기의 물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유럽 제국주의 진출 이전 동남아시아에 상업 관행이 존재했다는 중요한 증거다. 출처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누리집
수많은 여행 프로그램과 정글의 법칙 속 동남아시아의 이미지는 여전히 부족 단위로 생활하는 저개발되고 정글로 가득 찬, 문명화가 덜 된 지역이다. 사실 이러한 우리의 이미지는 대부분 유럽 중심주의에 기반을 둔 제국주의적 시선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수백년 동안 이어진 착취와 배제에 따른 식민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상업과 자본주의라고 불릴 만한 근사한 ‘돈’의 문화가 아예 없었던 것일까? 의외로 그 열쇠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돼지저금통에 있다.
서구 식민화 이전의 상업 문명 지금이야 어린 자녀들의 저축과 소비 습관을 위해 주로 교육 목적으로 활용되는 돼지저금통이지만, 사실 은행과 같은 기업과 근대적 금융제도가 정비되지 않은 과거 사람들의 상업 관행에서 돼지저금통은 그들에게 돈을 모은다는 행위에 대한 개념이 이미 정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그리고 놀랍게도 현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돼지저금통의 대부분이 바로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대량 발견되었다. 이르면 1300년께의 것으로 여겨지는 자바섬의 돼지저금통은 이미 이 지역에 동전(혹은 금전, 은전) 형태의 화폐가 존재했고, 이를 모으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로 진흙으로 정교하게 돼지를 묘사한 이 유물들은 등 부분에 동전을 넣는 구멍이 있어 유럽 제국주의 진출 이전 동남아시아에 이미 ‘저금’이라는 중요한 상업 관행이 존재했다는 점을 추측하게 해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돼지저금통의 존재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자비 없이 깨부순다.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학자들이 가진 동남아 인식 역시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기간에 걸친 식민으로 경제적 기반이 거의 없고, 그 영향으로 정치적 격변이 끊이지 않는 지역 정도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서구 문명의 가장 빛나는 성과인 자본주의와 그와 연계된 상업 관행은 오로지 서구의 전유물이라고 인식했기에 ‘미개한’ 동남아시아 문명에 그러한 동력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1990년대를 전후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동남아시아 주요 나라들이 정치적 격변을 어느 정도 극복하면서 국가로서의 기능을 정상화하기 시작하고, 동북아시아를 포함한 아시아 문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국제사회에서뿐만 아니라 학술적으로도 진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유럽 나라들이 동남아시아를 식민화하기 이전에 이미 이 지역이 나름의 문명을 형성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수준마저 그리 낮지 않았다는 것이 다양한 루트로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동남아시아는 이미 기원전부터 남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중개지역으로 교역을 담당할 정도의 문명적 수준을 이룩했고, 그 전성기가 바로 서아시아 이슬람 상인그룹의 진출로 시작된 이슬람화와 포르투갈로부터 시작된 유럽 진출 초기까지의 시기였다. 저명한 동남아시아 사학자인 앤서니 리드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이른바 이 동남아시아 ‘상업의 시대’(Age of Commerce)에 주목해왔다. 이러한 연구들의 공통점은 동남아시아에도 자본의 유통과 축적과 같은 상업적 요소들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증거가 바로 지금까지도 각국에서 끊임없이 발굴되는 화폐의 존재다. 상업거래의 수단으로 물물교환이 아닌, 교환의 매개로 화폐가 존재했다는 것은 동남아시아 문명이 이룩한 상업적 발전 정도를 가늠하게 해준다. 흥미롭게도 그렇게 발견되는 다양한 화폐들 가운데 가장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으면서 양적으로도 많이 발견되는 화폐가 바로 송(宋), 원(元) 시기 중국에서 주조·발행되어 해상 실크로드의 흐름을 타고 동남아시아로 건너온 중국산 동전이었다.
최근 다양한 발굴과 적극적인 해석으로 인해 동남아시아 화폐의 사용 시기가 점차 거슬러 올라가는 추세다. 사진은 태국(타이) 남부와 말레이반도 북부에 위치한 끄라비주에서 발견된, 3~5세기께의 유물로 추정되는 금전들이다.
중국에서 동남아로 건너온 동전들 사실 동남아시아는 이미 기원전부터 화폐를 쓰고 있었던 중국이나 인도 문명에 비해서는 화폐의 사용 시기가 상당히 늦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나마 일찍부터 화폐가 사용된 것으로 예측되는 자바 지역의 경우 9~10세기의 기록에 이미 다양한 목적의 화폐가 쓰였다고 하는데, 주로 금과 은, 혹은 철괴의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형태의 화폐는 상업적 거래의 목적일 경우 귀중품 거래, 종교적 목적인 경우 제의적 성격이 강했다. 이는 이때 금, 은, 철 등의 물품을 거래수단으로 사용은 하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화폐 개념으로 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귀금속이었기 때문에 물물교환과 화폐거래의 과도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초기 주조되어 사용된 자바 지역의 화폐는 일정한 규격과 금속 비중을 담보로 하는 일반적 형태의 금속화폐와는 달리 그리 흔하지도 않고 형태도 다양하다. 지금도 9세기 마타람 왕국에서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금으로 된 화폐를 비롯하여 다양한 화폐가 속속 발굴되고 있지만, 사실 금, 은과 같은 귀금속은 당시 자바 지역의 경제 규모에서 일상생활에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가치가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 역시 이러한 귀금속 화폐의 경우 주로 제사, 의례 용도나 중앙에 대한 지방의 세금 납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전히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발굴과 적극적인 해석으로 인해 동남아시아 화폐의 사용 시기가 점차 거슬러 올라가는 추세다. 예를 들어, 태국(타이) 남부와 말레이반도 북부에 위치한 끄라비주에서 3~5세기께의 유물로 추정되는 금전들이 발견되었다. 이 금전을 두고 초기에는 앞면에 확연히 새겨진 두상 때문에 로마시대 금전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로마시대 기념주화와는 그 형태가 약간 다르고, 뒷면에 인도 남부와 동남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던 고대 브라흐미문자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어 스리랑카의 인도-로마 융합문화의 영향으로 수정 해석되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고대 인도 사회에서 금전보다는 동전과 은화가 주로 사용되었다는 근거를 통해 말레이반도 현지 생산의 카피본일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그 결과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화폐 사용 시기가 더 당겨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소규모 상업거래 및 일상생활에서의 화폐 사용은 좀 더 낮은 단위의 동전(銅錢)이 송대 중국에서 대량으로 주조되고, 해상 실크로드의 바람을 타고 동남아시아로 건너오게 되면서부터다. 송은 중국 경제사에서 상업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대운하 건설 이후 본격화된 강남개발이 꽃을 피우면서 인구의 증가, 상업의 발달, 상품경제의 확산, 각종 상품의 다양화, 상인조직의 형성, 유통망 건설 등의 현상들이 대규모 동전의 주조와 함께 송 제국을 중국 역사상 가장 부유한 시기로 만들었다. 특히 항저우로 수도를 옮긴 이후 남송 시기에는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남중국해를 건너는 해외 교역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대량의 동전이 이슬람 상인들과의 교역, 혹은 푸젠 및 광둥 출신 중국 상인들의 동남아 진출을 계기로 흘러들어 동남아시아의 경제를 뒤흔든다.
북송시대 주조된 동전. 각각 함평원보, 대관통보, 선화통보. 출처 위키피디아
송대 중국에서 출발한 동전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동남아시아로 퍼지게 되었는지는 당시 동전을 품은 해저 침몰선의 분포를 통해서 보면 좀 더 선명해진다. 당시 송대 해관의 역할을 하던 시박사(市舶使)가 위치한 취안저우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예측되는 정크(Junk)선들의 침몰 유적이 말레이반도 서남단의 믈라카 해협, 자바해로 이어지는 해저에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분포는 당시 송대의 동전이 남중국해를 건너 말레이반도를 거쳐 자바로 흘러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당시 말레이반도, 수마트라, 보르네오, 자바로 둘러싸인 동남아시아의 바다를 장악한 거대 정치체의 존재와 깊은 연관이 있다. 9세기에서 14세기 말까지 이 지역의 헤게모니는 동남아시아 최초의 해상제국 스리비자야에 의해 장악되었고, 이후 그 패권이 스리비자야를 몰아내고 자바를 중심으로 해상제국을 건설한 마자파힛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믈라카 해협은 해역도시 믈라카(Melaka)에 의해 장악되었다. 두 해상제국 시기를 거치면서 믈라카 해협과 자바 지역에 대량의 동전이 흘러 들어가고, 이를 통해 일정한 규격과 금속 비중을 가진 화폐의 존재를 인식한 동남아시아 문명은 중국의 동전뿐 아니라 중국을 따라 자체 주조한 동전(혹은 특산품인 주석으로 주조한 화폐)을 활용함으로써 화폐 사용이 일상화되는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중국산 동전은 금, 은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고 형태가 규격화되어 있어 거래 때 숫자를 세기 용이한지라 개수화폐(個數貨幣)로 활용될 수 있었다. 동전의 사용은 이 당시 중국과 동남아시아 해양지역 상업의 규모가 좀 더 거대해짐과 동시에 그 관행이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정교해졌음을 방증한다.
특히 동전이 적극적으로 사용된 자바섬의 경우 14세기 이후 거대 해상제국인 마자파힛 시기로 들어서면서 국가 규모가 커졌다. 그뿐만 아니라 서아시아 및 남아시아의 이슬람 상인, 중국 상인과의 무역 규모 역시 증대하면서 국가 전체적으로 일상에서 쓰일 더 낮은 단위의 화폐가 필요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수입한, 혹은 현지에서 중국을 따라 주조한 동전이 유통된 목적은 국가에 대한 세금, 벌금, 빚, 무역거래, 소규모 상업거래 등으로 더욱 정교해진다. 거래 규모가 커지면서 수백에서 수만의 동전을 세기 위한 단어로 피시스(pisis)가 고안되기도 했다. 이전 귀금속 중심의 교환수단이던 화폐의 사용이 일상의 동전 유통으로 대체된 것이다. 자바 지역에서 동전을 저금하는 수단으로 돼지저금통이 이 시기에 발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원후 두번째 천년의 전반기 동남아시아 해양부를 장악한 두 제국, 스리비자야와 마자파힛이 이러한 규모의 경제를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믈라카 해협이 서아시아와 인도에서 건너온 이슬람 문명과 중국의 해양문명이 교차하는 지역이었고, 자바섬의 북부지역이 이들 외부 상인들이 원하는 정향과 육두구 등 향신료의 주요 생산지인 말루쿠제도(향신료제도)를 중개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역의 확대가 전체 경제 규모를 증대시켰고, 그 속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현지인들의 상업 관행을 좀 더 정교하게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화폐 사용의 일상화를 불러온 셈이다. 이러한 양상들이 각종 고고자료의 발견과 문헌자료의 해석으로 선명해지면서 과거 동남아시아 지역의 상업 관행 연구를 바탕으로 동남아시아 문명에 대한 재인식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1880년대 자바섬의 바자르(시장) 풍경. 출처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누리집
19세기 말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노점 상인. 출처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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